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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자료...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2010. 9. 21. 23:31728x90
불교팔대성지(佛敎八大聖地)
부처님의 행적을 기리는 곳, 여덟군데를 "불교 8대성지" 라고 한다. 경전 [불설팔대영탑명호경(佛說八大靈塔名號經)]에서는 불교팔대성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번째의 장소는 가비라성(迦毘羅城)의 용미니(龍彌 ) 동산 즉 룸비니에 있는 것으로 부처님의 출생지이다. 두번째 장소는 마가다국(摩伽陀國)의 니련하(泥連河) 기슭에 있는 보리수 아래는 부처님이 불도를 깨우친 곳이며, 세번째는 가시국(迦尸國)의 바라나성(波羅奈城)은 처음 불교의 가르침을 편 곳이다. 네 번째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원(祇園) 정사로 대신통력을 보인 곳이다. 다섯 번째는 곡녀성(曲女城)으로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내려온 곳이다. 여섯 번째는 왕사성(王舍城)으로 여러 제자들을 받아들여 교화한 곳이며, 일곱 번째는 광엄성(廣嚴城)의 영탑(靈塔)으로 부처님이 자신의 수명에 대해서 사유한 곳이다. 여덟 번째는 구시성(拘尸城)의 사라(娑羅) 숲에 있는 두 그루의 큰 나무 사이에 있으며,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에 든 장소이다. 이러한 여덟 곳(룸비니, 보드가야, 녹야원, 슈라바스티, 상카샤, 라지기르, 바이샬리, 쿠시나가라)에 탑을 세우고 큰 신심으로 공양을 하면 큰 복과 이익을 얻게 되며, 죽은 후에도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룸비니
룸비니는 석가모니의 탄생지다. 원래는 석가모니의 부모인 정반왕(淨飯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고향 데바다하의 중간에 있던 원림(園林)의 이름이다. 한역(漢譯) 불전(佛典)에는 남비니(藍毘尼) 등으로 음역되고 있다. 마야부인이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이 원림에서 무우수(無憂樹)가지를 붙들고 석존을 오른쪽 옆구리로 출산했다고 한다. 1897년에 네팔 변경에 있는 루민디라는 마을에서 ?석존 탄생지에 참배하였다?는 아쇼카왕의 비문(碑文)이 발견됨에 따라 이 곳이 석가탄생의 유적지임이 확인되었다.
보드가야(Bodhgaya)의 불교행사인 칼자차크라(Kalachakra) 주간을 알리는 야경사진이 현지 인도신문의 톱(Top) 기사로 실렸다.(The TIMES of INDIA 2003. 1.15) 현란하게 불을 밝힌 대탑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처럼 찬연하다. 그 빛을 향해 하루를 지새우고 동트자마자 마하보디 사원(Mahabodhi Temple)으로 향했다.
때마침 칼라차크라 행사(1.12~1.18) 중이어서 붉은 승복의 티베트 승려들이 물결을 이루고, 사원 입구엔 수많은 걸인과 좌판 상인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다. 티베트의 5종파중의 한 수장인 까르마파님이 설법한다 하여 그를 친견하려는 행렬이 끝없는데 서양인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띤다.
중국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망명정부를 가져야 했던 티베트의 역사. 그들의 눈물겨운 삶과 달라이라마 생애를 다룬 영화 ‘쿤둔’을 몇해전 나는 아내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보았었다. 그런데 박해자와는 다르게 이 슬픈 티베트의 삶과 종교를 존중해주는 오늘의 인도는 넓은 아량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 사실 모두 힌두교가 된 마당에 불교 유적지의 보호와 타 종교 행사를 크게 보도하고 간섭하지 않는 구석이 돋보인다.
보드가야.
고타마 싯다르타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곳. 가야(gaya)에서 니란자라강을 따라 남쪽으로 11km 정도의 위치에 마하보디사원의 대탑(52m)이 있고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보리수와 금강좌(金剛座)가 놓여있다.
그 어느날 새벽이었다. 생사(生死)의 근본인 무명(無明)이 소멸되면서 동쪽하늘에는 샛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순간 싯다르타는 홀연 깨달음(正覺)을 이루어 붓다(Buddha; 진리를 깨친 사람)가 되었으니 형언 할 수 없는 법열(法悅)에 겨워 세상을 향해 외쳤다.
“아! 번뇌는 모두 사라졌다.
번뇌의 흐름도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태어남의 길을 밟지 않으리니,
이것을 번뇌의 마지막이라 말하리라.”
오늘날 대탑의 위용과 거대한 보리수는 실제 옛것은 아니지만 붓다의 성불지로 진리와 깨달음의 길을 따르려는 승려와 신도들로 화엄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대탑의 장식중에는 부처조각상으로 안치된 것이 많이 눈에 띄는데 실제 대탑은 힌두사원의 양식을 수용한것이라 한다. 즉 B.C250년경 아쇼카왕에 의해 건립된 사원은 그 후 많은 변모를 보이다가 무슬림 침공(A.D 1158년)으로 밀림과 흙속에 파묻혔다. 그리고 최근 1884년 인도정부의 발굴로 재개되었고 1953년 ‘보드가야 사원 경영위원회’가 발족되어 오늘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 보면 대탑보다는 사원 입구에 부러진 아쇼카석주가 도리어 초기 불교의 유산으로 기려진다. 보리수 또한 세월을 거듭하여 이교인들의 훼손과 수명을 다했으므로 그 손자나무 묘목으로 끈끈이 이어져 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 만개의 유황램프 일산화탄소 때문에 보리수가 서서히 죽어 간다하니 시급한 대처가 있어야겠다.
행사 물결은 이 같은 사정 속에서도 펄럭이는 오색 깃발아래 뜨거운데 그 찬탄과 찬미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하심(下心)으로 더욱 빛난다. 검붉은 승복을 입은 티베트 승려들의 저 숭고한 신심(信心)을 무엇으로 형용하랴.
아예 물병을 몇 통씩 곁에 두고 널빤지 위에 손가락지를 낀 채 행사기간 내내 온몸을 던지는 티베트승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눈시울이 뜨겁다. 무엇이 저토록 간절한가. 국토를 잃은 겨레의 애환이, 그들의 소망이 저 기도속에 담겨 있는 한 그들의 역사는 다시 씌어질 것이다.
행사장 주변은 2층의 난간으로 수많은 승려와 순례객이 대탑을 돌며 탑돌이 중이다. 또한 여러 양식의 작은 탑이 빼곡하고 보리수를 향해 절하는 승려들의 발원, 오색 깃발이 대탑을 가로 지르며 출렁이는 장면은 그대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이다.
한편 보리수 아래서 발견되는 불족석(佛足石)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첫발을 내디딘 곳을 기념하여 새겨놓은 것이다. 그 대각(大覺)을 이룬 현장, 붓다의 발자취를 찾아 온 혜초스님은 감격에 겨워 5언 싯귀를 남겼다.
마하보리사를 이 이역만리가 멀다하지 않고 왔노라!
이제 저 카시에 있는 녹야원을 어찌 멀다 하리오?
단지 걸린 길들이 험한 것이 근심일 뿐,
가고자 하는 내 뜻은 바람에 휘날린 적이 없노라.
아~ 아~ 팔성지의 스투파는 정말 보기 어렵구나!
이미 겁탈당하고 불타버려 온전한 모습이 없네!
어찌 계림(신라)에서 온 이 사람의 바램이
다 성취되기를 바랄 것이랴마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모습이
그대로 부처님 모습이 아니겠누! (도올 김용옥 역)
비록 오늘의 대탑은 힌두의 양식을 반영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미 보드가야의 상징이요. 세계유산이 된 만큼 미래속에서는 불교 문화유산으로 더욱 존중 받을 것이 자명하다. 모든 대상은 의미 부여를 통해 되살려지고 그 가치가 존중되며 역사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인즉.
이렇듯 생각을 여미고보니 대탑은 하늘을 찌르고 우주의 정기를 하나로 모아내는 상징물로 우뚝 솟아있다. 그 조형물 아래 만인의 기도가 화엄물결 이루어 붓다의 깨달음을 기념하는 마당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도 대탑과 보리수를 바라보며 그 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 기도를 향한 실천의 삶을 지금 살아내고 있는지, 언젠가 내게도 작은 깨달음이 도래(到來)할 그 날이 있을는지. 오늘도 그 그리움과 기다림속에서 먹을 갈고 붓을 든다.
녹야원
범어로 사르나트.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한 곳이다. 선인론처(仙人論處)?선인주처(仙人住處)?선인녹원?선인원(仙人園)?선원?녹원(鹿苑)?녹림(鹿林)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석가모니가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이곳에서 설법했을 때 아야다교진여(阿若多?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했다고 한다. 탄생(誕生:룸비니)?성도(成道:부다가야)?입멸(入滅:구시나가라)의 땅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다메크탑(塔)을 비롯한 많은 불교 유적과 사원(寺院) ?박물관 등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박물관...
사라바스티
공양과 교화 꽃피운 ‘실천’의 무대
붓다의 위대성은 사실 깨침을 나눌 수 있는 실천의 장(場)을 함께 일구었다는 점에 있는 지도 모른다.
당시 라즈기르(왕사성), 죽림정사에 머물고 있던 붓다에게 수닷타(Sudatta)장자가 찾아와 쉬라바스티(Sravasti), 즉 사위성(舍衛城)으로 와 주실 것을 청하자 그의 뜻을 존중, 수락해준 까닭에. 그 수닷타로 인해 마침내 기원정사(祇園精舍)가 건립되었다는 사위성을 찾아가는 길은 신화와 전설 같은, 그리고 기적의 현장을 찾는 설렘으로 모두를 들뜨게 한다.
“우리 모두 스스로 신통력(神通力)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신통을 맞추면 원하는 대로 해가 뜨고 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붓다의 제자 중 가장 신통력이 영험했다는 목련존자(目連尊者)의 얘기를 들려주는 달공 조홍식 박사님. 팔순을 넘게 수행해 오신 박사님의 뜻은 마음먹기에 따라 천지간의 운행도 개개인의 내면세계로 달라지고 변화무쌍하다는 말씀.
그러나 이것은 결코 가시적(可視的)이 아닌 것에 비해 그 옛날 붓다께서 친히 신통과 기적을 보이셨다는 사위성 길목의 어느 언덕. 현재 오라자드(Oraghad)라고 부르는 언덕은 발굴되지 않은 스투파 터인데 이곳에 오르면 즐비한 망고나무숲 위로 기원정사(서)와 왕사성 마을(북)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그 망고동산 위로 천개의 붓다상이 나투었다는 하늘 스크린의 무대는 실로 순례객의 상상을 자극한다.
기록상 만부득, 이교도의 지나친 침해와 정법수호를 위해 자비심을 바탕에 둔 붓다의 신통은 결코 과시가 아니었음이 곳곳에서 살펴진다.
여인의 유혹에 빠진 제자 아난다를 구하기 위한 계기로 <능엄경>을 설해야 했고, 챤다마나 라는 여인의 위장 모함(임신)으로 붓다의 위상이 흔들릴뻔 했던 일. 데바닷타와 앙굴리마라의 도전을 항복시켜야 했던 일이 있었으니 황무지를 일구기 위한 노력은 실로 많은 도전을 받았다.
사위성은 당시 북인도에서도 강력한 군주국가 코살라(Kosala)국의 수도로서 유물론적 사상과 자이나교가 성행하고 있어 불교의 토착화는 시련과 모험에 따른 새로운 비전이 요구되었다. 이로써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이 설해지는 등 많은 경전이 출전되었던바 이곳 사위성과 기원정사는 마침내 교화의 중심지로 발돋움 하게 된다.
‘천불화현(千佛化現).’
오라자드 언덕에서 동산지기가 드린 망고를 먹고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 에 피어오르게 하고, 붓다의 몸이 천상에 천불(千佛)로 나투어 기적을 보였다는 하늘은 오늘 그지없이 맑고 푸르다.
이 사건은 붓다의 생애 중 매우 중대한 이야기로 형상화 되었는데 초기 불교조각과 벽화로는 아잔타 석굴이 대표적이다. 그 천불의 전래는 한국의 가람으로 불어와 천불전(직지사 등)을 따로 모셨고, 최근 안성 도피안사 대웅전, 비구니회관 후불탱화도 천불로 장식했다. 모두가 다른 양식과 제작자의 솜씨에 따라 천불은 그야말로 천태만상. 그러자니 누군들 천불을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있으랴.
따라서 붓을 든 나그네는 돌연 천불화현의 무대가 된 허공에서 구름을 불러 모아본다. 그리고 갖가지 형상으로 천불의 이미지를 붓질해 본다. 하긴 누가 붓다를 보았다 하는가. “나를 보려거든 진리를 보아라” 하였거늘.
결국 나의 만용은 제주 영실 뒷산의 오백나한봉, 영암 월출산의 부처바위를 떠올렸고, 실제 금강산의 만물상과 바다에 뜬 칠성암, 천불암을 그린 겸재(謙齋)정선(1676~1759)의 인물형태 이미지 구성에 의지하였다. 하긴 <화엄경(華嚴經)>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서 사방팔방으로 거주하고 있는 보살을 열거하는 중 법기(法起) 보살이 머문다는 바다 속 금강산이 봉래산(蓬萊山)이라고 확신(최완수)했던 선인들의 생각 또한 오늘 따라 간절해진 까닭에.
이제 사위성 가는 길목, 마을로 들어서자 온통 지뢰밭(?)이다. 오늘은 마른 쇠똥이
아니라 방금 싸 놓은 쇠똥이 지천으로 널렸는데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거대한 쇠똥은 햇살에 반질반질 윤기마저 더하니 마치 건강한 생명 자원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길섶에서의 충격. 검은 개가 눈이 뒤집힌 채 이를 악다물고 죽은채 버려져 있다. 또 어젯 쯤 화장을 치루었는가. 타다 남은 볏단위에 버려진 대나무 들것과 시들은 원색의 꽃들. 그리고 흙으로 빚은 물단지 하나가 휑하니 뒹굴고 있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처럼, 그렸다가 지우는 그림처럼 가없는 목숨이여.
마을을 지난 길은 쑥대밭 같은 황량한 벌판으로 이어지니 곳곳에서 발굴흔적이 눈에 띈다. 그 옛날 비구니 사찰터로 추정되는 동남문터 아래는 지표보다 낮은데 동행한 토목공학 전문가는 “이곳 토양이 연약한 지반이라 높은 건축은 무리였을 것이고, 침강, 침하의 우려로 지질학상 표면보다 낮게 건축되었을 것” 이라는 설명인데 둘러보니 구덩이가 파인 집터가 즐비하다.
한편 완만한 둔덕과 지평을 이룬 벌판위로 우뚝솟은 나무들은 거의 보리수였는데 다가설 수록 거대한 위용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화첩을 펼쳤다.
결국 멀어진 일행을 부지런히 따라가자 모두들 어느 벽돌 건축물에 앉아 야외 강의를 듣고 있다. 내용인즉 기원정사를 건립한 수닷타장자의 원대한 불사를 기리는 사연이다.
붓다께 정사를 지어 헌공하려는 지극한 정성은 “만일 그 동산을 사려거든 금으로 그 동산을 모조리 덮어보라”는 주인의 말에 따지거나 매달리지 않고 그대로 행했다는 실천의지. 이에 감동한 주인이 마침내 조건없이 희사한 아름다운 사연. 정녕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려니.
그런데 지금 앉은 건축물이 바로 발굴에 의해 수닷타의 집터로 알려진 곳이다. 또 이곳에서 건너편 언덕 아래에 보이는 건축물은 한때 악마의 사자였던 앙굴리마라의 스투파라 한다. 그는 꾐에 빠져 100개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로 만들고자 끝내는 어머니에게 마저 덤볐으나 갑자기 붓다가 출현, 설법하므로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는 사연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벗이여, 죽이려는 사람 앞에 미운 마음도 괴로운 마음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그 죽이려는 사람을 향해 ‘네가 바로 부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니라.”
산카시야
어머니의 교화(도리천에서의 하강)
부처님이 성도한 해에 왕이 된 파사닉왕(Prasenajit)은 불법을 독실하게 믿어 외호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사부대중들이 게으름이 많아 모두들 법을 듣지 않고, 또 방편을 구해 몸으로 증득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거두지 못할 것을 거두고,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이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법을 간절히 우러르게 하시기 위해 시자에게조차 알리지 않으시고 팔을 굽혔다 펼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에 기환숲에서 사라져 삼십삼천으로 가시고는 신통의 힘으로 몸을 숨겨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삼십삼천에서 몸을 변화시켜 지극히 넓고 크게 하시리라 생각하였다. 그 때 천상의 선법강당에는 가로 세로가 1유순이나 되는 금으로 된 바위가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그 돌바위 위에 가부좌하고 앉으시자 그 바위가 꽉 찼다.
그 때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야께서 여러 천녀들을 거느리고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물러나 앉아 말했다. “뵙지 못한 지 너무 오래인데 이제 이렇게 이곳으로 와 주셨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뵙기를 간절히 바랬더니 부처님께서 오늘 이렇게 오셨군요.”
어머니 마야는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한 뒤 한쪽에 앉았다. 석제환인도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고, 삼십삼천도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앉았다.
그 때 모든 하늘들은 부처님께서 그곳에 계시면서 하늘 무리는 불어나게 하고 아수륜 무리는 줄어들게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나서 부처님께서는 어머니와 그 하늘 무리들을 위해 보시에 대한 논[施論], 계율에 대한 논[戒論], 천상에 태어나는 데 대한 논[生天論]에 대해서 설법해 주시고, 또 “탐욕은 깨끗지 못한 생각이고 음욕은 더러운 것이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즐거움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이 말씀을 들은 여러 대중들과 하늘 사람들은 마음이 열리고 뜻에 이해가 생긴 것을 보시고는 사성제의 교의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마침내 그곳에 있던 사부대중은 그 자리에서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안이 깨끗해졌으며, 또 18억 천녀들은 도의 자취를 보았고 3만 6천 하늘들은 법안이 깨끗해졌다.
이 때 마야 어머니도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하늘궁중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 때 인간세상의 사부대중들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해 그리워하고 있었다. 파사닉왕과 우전왕도 부처님을 그러워하다 결국 병이 나고 말았는데, 신하들은 아마 왕이 부처님을 뵙지 못한다면 곧 죽을 지도 모른다라는 걱정으로 생각해 낸 것이 부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하려는 것을 안 우전왕은 신하들을 칭찬하며 너무도 기뻐하였다.
결국 나라안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에게 명령하여 우두전단나무로 높이 여섯자 되는 여래상을 만들게 되었다. 이에 소문을 들은 파사닉왕도 뛰어난 조각가를 불러 명령하여 순전한 자마금으로 높이 다섯자 되는 여래상을 만들었으니, 그 때 염부리 안에 비로서 두개의 여래형상[불상]이 있게 되었다.
한편 사부대중들은 아난에게 부처님은 대체 어디에 계시냐고 물어왔다. 아난은 사부대중들과 그럼 함께 천안제일의 아나율에게 물어 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아나율의 눈으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국토를 살펴보았지만 신통으로 가려진 부처님은 도저히 볼 수 없었다.
도리천에 계신 부처님은 석달을 지내시고는 염부리의 사부대중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줄 아시고, 그만 신통을 풀고 삼십삼천에 있음을 알게 하셨다.
그 밤에 천신들은 아난에게 부처님의 거취를 알려주어 천안제일의 아나율존자로 하여금 그것을 확인하게 하였다. 아난과 사부대중들은 부처님께 문안 올리러 가는 사람을 정했으니 그는 신족제일의 목련존자였다.
목련존자는 사부대중들의 부탁을 받고 팔을 굽혔다 펼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에 삼십삼천에 도착해서 부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갔다.
목련은 부처님께서 한량없이 많은 대중들을 위해 설법하시는 모습을 향해 “부처님이시여, 사부대중들이 여래께 기거는 편안하고 행보는 건강하신지 문안드린다고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염부리에서 자라나 이 세상에서 도를 얻으셨습니다.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소서. 사부대중들은 애를 태우며 뵙고 싶어합니다.”하고 간절히 말씀드렸다.
이러한 청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다시 사부대중들로 하여금 수행에 게으름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시고 지금부터 이레 뒤에 승가시국 큰 못으로 가리라고 약조하셨다.
이 때에 목련존자는 아주 빠른시간에 기수급고독원으로 돌아가 왕들과 사부대중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올리자 모두들 뛸 듯이 기뻐하였다.
부처님 오실때를 맞추어 파사닉왕은 네 종류의 군사를 모으고 못 가로 나아갔고, 나머지 다섯왕들 사부대중들도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곳으로 나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레가 되자 석제환인은 자재천자에게 부처님께서 신통을 부리지 않고 내려가시려고 하니 수미산 꼭대기에서 상카시아의 못 가까지 세개의 길을 닦을 것을 명령하였다. 자재천자는 곧 금. 은. 수정으로 된 세 길을 신통으로 만들었다. 가운데에 금길을 두고 양쪽가로 수정길과 은길을 만들고 길 가에는 금나무를 심어놓았다.
부처님께서는 곧 가운데 길로 걸어오시는데 그 때 범천은 부처님의 오른쪽 은길에 서 있었고, 석제환인은 수정길 가에 서 있었으며, 여러 하늘신들은 허공에서 꽃을 뿌리고 향을 사르며 풍악을 울려 부처님을 즐겁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만의 하늘 신들을 거느리고 수미산 꼭대기에서 못가로 내려오시면서 발을 들어 땅을 밟으시자 삼천대천세계는 진동하였다.
이와같이 부처님께서 도리천으로부터 상카시아로 내려오신 것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깨끗해서 하늘과 사바세계를 연결하는 성지로 적합했던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상카시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외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라즈기르
진리의 꽃 피어난 靈山
한국의 양산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그 산이름이 유래한 왕사성(라즈기르)의 영축산(독수리 봉우리 이름을 딴산)은 정다움을 넘어 순례자에게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들려준다.
영축산에 머물던 붓다께서 설법도중 한 송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내 보이자 모든 대중이 어리둥절할 때 유일하게 마하가섭(마하카샤파)만은 그 뜻에 응화(應化), 빙그레 웃음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
영축산
그 환한 얼굴을 비추었을 그날의 빛이 영상처럼 떠오르고 열락(悅樂)의 세계가 여전히 꽃비를 뿌리는 듯 지금 영축산 독수리 봉엔 오색 깃발이 찬란하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천지의 산능선이 출렁이니 모든 봉우리는 마치 독수리봉을 에워 싸고 둘린 느낌이다.
마침내 붓다의 부촉(咐囑)은 그날 “여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비로소 열린 세상을 향해 꽃내음이 진동할 때 영산회상곡은 산천으로, 삼천대천 세계로 울려 퍼졌으리라.
그런데 오늘 일행을 위해 붓다께서 이곳에서 설한 <법화경>의 중대성을 갈파하던 김영태(金煐泰)박사(불교사상사, 전 동국대교수)님이 우연히도 설법 후 잠시 삼매경에 들어 천상에 나투신 붓다와 불·보살을 친견했노라고 감읍해 한다. 평생 불성(佛性)속에 정진해온 노학자의 오랜 숙원과 간구, 영축산의 가피가 결코 우연만은 아니리라.
사생을 위해 살펴본 산봉우리는 어김없이 독수리 형상을 띠었고 두 날개를 펼친 형국도 산이름에 걸맞다. 산정상엔 설법좌, 즉 여래향실(如來香室)의 기단부를 복원(1903년)했고 이곳에서 출토된 붓다상 및 기타 유물은 나란다 박물관에서 보존중이라 전한다.
무엇보다 붓다가 영축산에서 설한 <법화경>의 ‘견보탑품’ 중 주목되는 내용은 경을 설하는 붓다 앞에 다보여래의 탑이 솟아올랐다는 것과, 경을 설하고 계신 붓다를 탑으로 묘사하여 ‘석가탑’이라 명한 대목에서 경주 불국사의 다보, 석가탑의 유래를 보게 되는 내용이다. 이로써 불국사 뜨락의 이형탑 조성 근거는 명백한 진원을 얻게 된다.
하산 길에 산봉우리 아래 굴은 사리불 존자가 수행했다는 말에 다급히 화첩을 펼치는데 사진엽서를 파는 아이들로 여간 성가신게 아니다. 그들은 그림 그리는 나를 처음부터 구매객으로 점찍어 두었기에 어쩔 도리 없이 여러 아이들에게서 다양한 사진을 구했다.
결국 권력의 세계는 허망한 것인가. 타즈마할을 지은 사라한이 아들에 의해 아그라성에 유폐되어 죽어갔듯이 빔비사라왕 또한 그의 아들 아쟈타샤트루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영축산을 바라보며 죽어간 감옥터를 찾아간다.
그 감옥터에서 올려다 보이는 칠보산과 영축산 능선에는 자이나교 사원과 일본 사원이 우뚝 솟아 있다. 모두 보란 듯이 산정상을 차지한 사원에 비해 한국의 가람은 사실 얼마나 소박한가. 오로지 산을 둥지로 삼아 숨겨진 알터에서 조용히 향을 사르니 자연과 문화에 대한 감수성의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일행은 이제 온천지로 유명한 데바닷타 석실을 향해 가자 온천 뒤쪽으로 옛날 박칼리라 불리우는 비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불과(佛果)를 증득했다는 바위가 있다. 그의 몸에서 흘린 피가 붉게 물들었다는 ‘피로 얼룩진 바위’를 지나 ‘타포다 나디(Tapoda Nadi)’온천 및 ‘핍팔라 석실(Pippala stone house)’에서 바라보는 왕사성의 전망은 일망무제, 장엄의 극치다.
길을 이어 산을 오르는데 맨발의 소년과 강아지가 길라잡이 되어 앞서서 뛰어 오른다. 또 산길에서 마주친 나무짐을 가득 머리에 인 여인은 거친 손마디에도 온갖 장식과 화려한 색감의 옷을 걸쳤는데 그녀 역시 맨발의 청춘(?)이다.
목적지는 칠엽굴(七葉窟). 반시간여 땀을 씻으며 또 산을 오르자 두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나타나고 조금 비탈길을 내려가자 사진에서 본 칠엽굴이 마침내 드러났다.
이곳은 붓다 입멸 6개월 후, 마하가섭이 500명의 비구를 모아 붓다가 설한 경(經)과 율(律)을 집대성한 최초의 경전결집 장소라고 한다. 즉 불법의 꽃씨를 심은 뜨락이요, 그 꽃을 피운 다음 마침내 민들레 꽃씨가 되어 천지로 날아가게 한 불전(佛典)의 진원지 였음에랴.
예전에는 이곳 동굴 앞에 수백 명의 비구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넓은 회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장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다. 그 동안 깊고 넓었던 동굴은 풍화작용으로 굴이 무너져 내렸다. 즉 1939년 인도 고고학국에서 동굴을 실측했을 때만해도 6개의 동굴이 남아 있었고, 동굴 앞 공간은 36.57×10.36m(길이×넓이)나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동굴에서 뒤돌아보자 깎여나간 암반이 벼랑처럼 가파르고 시야는 아득히 허공을 비껴난다.
오늘은 이른 새벽부터 진종일 가야산과 영축산, 그리고 칠엽굴을 찾아 산을 오르내린 피로가 그새 몰려오니 땅거미 짙고 일몰이 잦아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순례의 길은 고단해도 마음은 달뜨는가. 아니 이 무슨 행운의 조화인가.
산길을 돌아서는데 일몰의 붉은 해와 둥글고 흰 낮달이 동서로 조응하며 옛 왕사성 하늘 위에 떠있질 않는가. 결코 환상이 아닌 뚜렷한 풍광속에 모두들 말을 잊고 합장하는 경건한 모습들. 참으로 알 수 없는 은혜요, 뜻 깊은 시절인연이다.
바이샬리
우주의 질서·대자연에 순응한 진리
무릇 고유한 것은 아름답다.
더구나 자연에 의지한 생활환경이 공생(共生)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삶은 짙은 그리움을 낳는다. 인도의 여정 속에서 수많은 비애와 안타까움, 그 빈곤과 질병의 현장이었던 역, 정거장, 시장과 도심거리에 비해 농촌의 삶은 그래도 안심이 된다. 간디는 말한다. “촌락이 망하면 인도 또한 망하게 된다.
그 때 인도는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내가 반대하는 것은 기계 그 자체가 아니라 기계에 대한 광신이다. 그것은 이른바 노동을 절약하게 하는 기계에 대한 광신이다. 사람들이 계속 ‘노동을 절약’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은 일하지 못하고 큰 길에 버려져 굶어 죽게 될 것이다… 국토 상에 인구압박이 큰 나라의 경제와 문명은 그런 압박이 가장 작은 나라 경제와 문명과는 다른 것이 정상이다.
인구가 듬성듬성한 아메리카는 기계를 필요로 할지 모르지만 인도는 전혀 기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백만, 수천만의 할 일이 없는 노동집단이 있는 곳에 노동을 절약할 기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간디평전> p333~335 곽영두 옮김) 문명사회를 꿈꾸는 시대상황에 비해 간디의 발언은 지나칠지 모르지만, 사실 문명의 가속화는 삶의 ‘발전’이기보다 ‘변화’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그 부작용을 떠올릴 때 사실 행복지수는 미지수이기 때문.
바이살리 아쇼카석주와 스투파를 지나 연못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자 한적한 농가로 접어든다. 그런데 지금껏 만난 어느 마을 보다도 정겨운 풍광이 펼쳐지니 인도 농가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즉 야자수와 망고나무로 둘린 마을 정경은 아득한 인류의 고향처럼 느껴지는데 소, 염소, 양, 닭들이 마당에 오종종하고 흙벽돌과 나무로 지은 가옥들이 너무도 소박하다.
또 동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알이든 닭장은 높이 매달아 두었는데, 익히 아프리카 여행 때 보았던 것과 유사하다. 한편으로 쇠똥 땔감과 짚더미주변, 잿불에 옹기종기 모여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얼비치는 얼굴들. 흙과 빛, 그 바람속에 익어온 모습들이다. 고백하건데 나의 부족한 붓끝과 필설로서는 마을의 정경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 주저되는 시간, 바람결에 들려오는 한 영혼의 목소리가 있었으니….
아난다야, 나는 등창이 났는지 등허리가 아프구나,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는냐.” 바이살리 근교 벨루바(Beluva)마을에서 마지막 안거(安居)를 지낸 붓다께서 열반지(쿠시나가르)로 가던 도중 이곳에 머물며 하신 말씀(대반열반경)이다. 그리고 바마세나 카팔라라 언덕에 이르러 힘든 몸을 일으켜 성을 돌아보시고 웃으시며 “이것이 내가 이 성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다.
이제 떠나면 이 몸으로서는 다시 이 성으로 오지 못할 것이다” 하시니 열반을 앞둔 붓다의 예언이었다. 이 위대한 인간 붓다의 마지막 뒷모습을 따라가는 여정 속에 마을을 빠져나오자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나무. 그 나무의 뿌리를 감싸주고 있는 자그마한 동산으로 올라갔다. 마치 우리네의 정자목, 당산나무 같은 실감은 노거수 허리에 붉은 천을 감아놓은 것에서 뭉클한 친화를 느끼며 상상의 나래를 편다.
붓다가 이 길을 지나가다가 이 나무그늘 아래 잠시 머물며 쉬어가는 광경은 우리 영화 ‘서편제’의 당산 목에서 이별하는 장면이 떠오르며 들녘을 이윽히 바라보는 눈길. 푸른 밭으로 난 길을 따라 아스라이 펼쳐지는 야자수 숲을 응시하며 우주의 질서와 대자연의 뜻에 순응하는 뒷모습이 영상처럼 펼쳐진다. 기록상에 의하면 붓다가 바이살리를 최초로 방문한 것은 기원전 585년(전법 5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위기에 빠진 이곳 밧지족들의 요청을 받아 머물렀다.
이때 붓다는 밤낮 이레동안 마을을 돌며 백성을 구제하는 경을 설하였다. 그리고 붓다가 이곳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기원전 545년(전법45년), 마지막 안거를 위해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때 팔순 노구의 붓다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회복한 후 3개월 후 쿠시나가라로 가서 열반할 것을 천명한다. 아난다야, 나는 이제 여든살의 노인, 늙고 쇠하였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듯 나 또한 간신히 굴러가고 있느니라. 아난다야, 그대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자신에게 귀의하라. 그리고 법을 등불삼고 그 법에 귀의하라. 그 밖의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라”고 설파하였다. 이 의미 깊은 붓다의 길을 따라 걷노라니 어느새 농가가 사라지고 끝없는 지평의 푸른 밭이 펼쳐진다. 그리고 노오란 겨자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광은 마치 제주의 땅과 유채꽃 길처럼 아름다운 들판이다.
그 꽃길을 끊임없이 따라오는 아이들. 볼펜과 루피를 달라고 조르는데, 순례객중 늘 후미에 처지는 나에게 벌떼처럼 달라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꼭 무엇을 얻기 보다는 낮선 이방인들을 본 아이들이 재미와 호기심으로 심심하던 차에 우리 뒷꽁무니를 따라오는 것이다.
내가 뛰면 아이들도 뛰고 내가 걸으면 그들도 천천히 걸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온다. 청명한 하늘, 산들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어린천사들과 함께 걷는 이 길이 혹 붓다가 걸어간 길은 아니었을까. 열반으로 가는 꽃길이 정녕 이처럼 아름답게 자연의 축복 속에서 이어졌을 것이라는 상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쿠시나가르
슬퍼하지 말라 죽지 않는 것 없으니
“아난다야, 한탄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일찍이 가르쳐준 바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 친한 사람과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지 않을 수 없다.”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붓다의 말씀. 지난해(2003년)는 유난히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연이어 열반의 세계로 떠나셨다. 그 분들 중에는 지난 시절, 친견의 은혜와 더불어 존영(尊影)을 담을 수 있었던 인연도 있었다. 이제 떠나신 후 그 모습을 떠올려 보니 마치 한때의 꿈처럼 아득하다. 그러나 세상 인연은 꿈꾸듯 다시 오는 법. 한 생각 일으켜 무수한 선지식의 길을 거슬러 스승의 그림자를 찾는다. 이른바 석가세존의 원적(圓寂). 그 열반당에서의 반추.
“내가 떠난 뒤, 가르침을 말할 스승이 이미 없으니 우리들의 스승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입적한 뒤에는 내가 설하고 제정한 법과 율이 너희들의 스승이다.”
제자 아난다에게 설하신 붓다의 부촉은 불가(佛家)의 법(法)되고 마침내 만고의 진리로 수많은 붓다를 길러내게 한 역사의 현장, 쿠시나가르(Kusinagar). 아침 일찍 안개속을 뚫고 열반당으로 향하는 심정은 붓다의 생애를 따라가는 마지막 여정으로 숭엄함보다는 애절함이 더하다.
지금껏 그림기행에서 살폈듯이 라즈가르(왕사성)를 떠난 붓다는 나란다를 거쳐 파트나, 그리고 갠지스강을 건너 바이샬리의 암바팔리 동산에 이르렀고 마침내 바이샬리 주변 벨루바마을에서 최후의 안거를 보냈다.(대반열반경) 그리고 그 길로 쿠시나가르에 이르기전 파질나가르( Fazilnagar)마을에서 춘다(Chunda)의 공양을 받고는 심한 통증으로 한층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붓다의 열반 예언이 일찍이 있지 않았던가.
하여 붓다는 아난다에게 “오늘 아침 금세공 춘다의 집에서 공양한 것이 마지막이 되었으니, 오늘밤 내가 입적 하는 것에 대해 춘다가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는 정당한 공양의 진심어린 배려로 읽힌다. 마침내 때가 되자 붓다는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모든 현상은 변한다. (따라서)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 위대한 깨달음의 성인. 그의 죽음은 참으로 담담하고 어찌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다. 재림의 기약이나 미래의 예언도 없이 구도자로서 최선을 다해 살고 조용히 가신 것이다.
또한 불가의 관행이 될까 우려해 “출가 수행승은 일절 장례에 상관 말라”는 유지는 일생을 걸사(乞士)로 살았던 참된 구도자의 자세를 살펴보게 한다.
한때 나는 어리석게도 지나온 이 머나먼 여정을 차로 달려도 어려운데 어찌 붓다가 걸어가셨을까 의문이 되어 한 선학께 일렀다.
“며칠, 혹은 몇 달을 걸어야하는 이 험난한 길을 붓다께서 어찌 걸어가셨을까요.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교통수단인 우마차를 이용하거나 코끼리, 낙타 등을 이용하지 않았을까요.” 이에 돌아오는 화답은 내 무지(無知)에 대한 통렬한 질타였다.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라’고 가르치는 붓다께서 무엇이 다급하였겠고 또 편리와 편함을 위해 동물 등에 올라탔을까요. 평생 걸사정신(乞士精神)으로 살아가신 자비의 구도자임을 떠올려 봄직이 어떠실지…”
이 부끄러운 일이 있은 후 참회로 맞이하는 오늘의 열반당. 사라나무 한 쌍이 일주문을 이룬 곳으로 일행은 따라 들어선다.
6.1m에 이른다는 거대한 금빛 와불이 열반상으로 모셔진 주변엔 티베트, 스리랑카, 일본 승려와 신도들이 모두 참배하고 있다.
살펴보니 기단부엔 슬픔에 젖은 말리부인(말리카)과 제자 아난다의 형상, 그리고 중앙에는 열반상을 제작했다는 기록상의 하리발라 스님상이 새겨져있다. 5세기경에 조성된 열반상은 모래와 진흙으로 이겨 형상을 만든 다음 금색을 입힌 것이다.
함께한 순례객을 마주하는 열반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지극한 참배객의 기도속에서 그 날의 영혼, 그 애절한 숨결들이 피어 오르는 것만 같다.
진정으로 붓다가 걸어간 ‘깨침’과 ‘자비’의 길은 손바닥의 안팎과 같고 나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 ‘진리는 곧 실천속에 있다’는 현실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그리하여 인류의 성인, 대우주의 자유인, 그리고 모든 생명의 대 보살로 우리 곁에 와 계심이여.
열반당을 나와서는 인근의 마타쿠아르 사원에서 젊은 날의 고타마 싯다르타상을 배관하고 이어 조금 떨어진 다비장으로 향했다.
흙벽돌로 쌓인 다비장은 라마브하르(Ramabhar) 스투파로 거대한 유적인데 꼭대기에 오르자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또 주변엔 수많은 망고나무가 에워싸 마치 이곳은 동산이 된 느낌이다.
스투파뒤란의 인근 사탕수수밭을 헤치고 둔덕을 따라가자 흰강이 드러났다. 그 옛날 붓다께서 건넜다는 히라냐바티강이 옛 사연을 안고 흐를뿐 목가적인 풍경도 다비장을 다시 바라보는 순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스투파 주변에서 일행들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홀로 촛불을 밝힌 티베트 스님에게 도리어 나그네의 눈길이 간다. 한때 한국의 다비장을 찾아 붓을 들었던 나와 저 수행자와는 오늘 어떻게 다르고 같은 심정일까.
마음에 불을 밝히는 일은 오롯이 스스로를 의지하는 일, 그리하여 게으르지 않게 쉼없이 정진하는 일. 따라서 산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에 대한 지속이며 실천임을 다시 깨닫는다.
새해, 새날의 서원으로 자리 잡는다.
인도 (印度: INDIA)
수도: 뉴델리.
면적:3백 29만 8천K (한반도의 15배, 남한의 33배)
인구:12억명 (2002년)
종교: 힌두교 83%,회교11%, 불교1%, 씨크교2%,
종족: 인도아리안 72%, 드라비다 25%, 몽골 3%
언어: 힌두어, 영어, 뱅골어 등 15개 국정어, 800여 방언.
정치: 내각제(연방공화국)29개주 6개의 속령.
의회: 양원제(대통령은 의회양원과 주 의회에서 선출)
근대 정치사
1660년 영국이 동인도회사 설립.
1858년 영국이 완전 식민지화함.
1885년 인도 국민회의 창립 (조직적 자치제 실시)
1890년 '마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반영 투쟁 시작.
1947년 8.15일 독립. 국민의회당 네루총리 취임.
1962년 중국과 국경 분쟁.
1966년 인디라 간디 총리 취임(네루의 딸)
1977년 국내 위급사태의 선포에 대한 반작용으로 비 국민 의회파인 잔타 연립 정부집권.
1979년 잔타 연립정부 와해.
1980년 신 상업정잭 발표.
1984년 과격파 시크교도에 의해 인디라 간디 암살, 그의 아들 라지브 간디 정부 집권.
1987년 대 스리랑카 평화유지군 파견
1991년 라지브 간디 암살 나라시마 나오 총리 취임.
인도의 역사는 세계 4대 문명인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기구하게도, BC 2500년경의 꽃을 피운 모헨조다로는 파키스탄에 있다. 이후 아리아인들이 밀려 들어와(BC 1500-1000)강 유역에 자리 잡고 BC600년경에는 북부 중부 인도에 16개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BC566-486에 석가모니가 불교를 열고, 자이나교의 마하비라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BC327년에 알렉산더 대왕도 인도 서북부에 원정하였고, BC320년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되었다. AD320 년에는 굽타 왕조가 일어났다. 그러나 8C경부터 이슬람교도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1526년에는 바베르의 무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당시부터 인도는 유럽 열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1600년에는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영국이 인도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885년에는 인도국민회의가 창립되어 자치운동을 전개하고, 1920년부터 간디의 불복종운동이 전개되었다. 1947년에는 양국의 많은 희생을 치르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을 쟁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면에서 인도처럼 다양한 나라는 없다. 그러면서도 개개의 차이를 포용해 나가는 인도처럼 큰 통일국가도 드물고 힌두교도가 대부분이면서도 국교를 힌두교로 정하지 않은 나라이다. 심지어 11.2%의 불과한 이슬람교도 중에서도 과거에 몇 사람의 대통령이 나왔을 정도이며 개개의 존재를 인정하는 전체로서의 통일성이 바로 인도라고 할 수 있다. 카레로 대표되는 음식문화가 인도의 통일성일 수도 있다. 신분상의 차이를 엄격히 구분하는 혼인집단으로서의 카스트가 인도의 통일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도의 통일성은 그 다양성을 안고도 갠지스강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포용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고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이면서도 문맹률은 60%나 된다. 그렇다고 인도를 ‘가난한 나라’ 후진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규모면에서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나라다. 그들은 4000년 전에 이미 오늘날의 서울보다도 더 뛰어난 하수도 시설을 갖춘 모헤조다로의 문명도시를 인더스 강 유역에 건설하지 않았던가! 개인의 조그마한 시각 차이로 문화를 판단하는 것은 현대인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문화
인도의 사회는 카스트의 사회다. 카스트라는 말은 인도인들 사이에 특이한 신분제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포르투갈 사람이 그것을 카스타라고 이름 붙인 데서 유래한 것이며, 출생을 뜻하는 자티( 색깔)라는 말로 표현되는 집단이다. 이 카스트는 브라만(승려),크샤트리아(왕족,무사)바이샤(상인,서민) 수드라와 언터쳐블(농민과 노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찍이 석가모니도 이의 타파를 시도하고 간디도 이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힌두사회의 현실 속에서는 이 제도가 나름대로 위계질서를 갖춰 그 내부에서는 개개인마다 각자의 역할을 지키기 때문에 여전히 타파되지 않고 있다. 인도의 유명한 간디 선생은 이 제도를 타파하고자 수드라의 아이를 입양한 적이 있다. 이 카스트제도는 인간을 차별하는 구시대의 유물로써 휴머니즘 관점에서 비판되고 있다. 또 법적으로는 차별이 금지되고, 도시에서는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다. 힌두교도는 만났을 때나 헤어질 때, 감사의 뜻을 표할 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합3장을 한다. 이때“나마스테“ 하고 말한다. 대답도 역시 합장하고 ”나마스테“ 힌디어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사례합니다. 의 뜻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인사말이다. 또 고개를 옆으로 흔들면 O.K를 뜻하다. 힌두교도는 왼손은 부정한 손으로 취급한다. 식사는 오른손으로 하고 남에게 물건을 건넬 때에도 왼손으로 주면 안 된다. 사원에서는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
★언어
공용어만 해도 15개
인도는 구성 종족이 다양한 만큼 언어의 종류도 다양하다. 최근의 조사에서 인도의 언어가 1652종류나 되는 것을 보고 인도인 자신이 더 놀랐다는 정도이다. 공용어로 쓰이는 언어만 해도 영어를 포함하여 15개이다. 지폐에는 이 15개의 언어가 다 인쇄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영어이고, 힌디어도 약 50%정도로 통한다. 현재는 각 주에서 자기들의 언어를 고집하여서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시차 3
시차는 3시간30분
한국보다 3시간 30분이 늦으므로 인도가 12:00일 때 한국은 15:30이다.
★인도인의 기질/생활상
1.평화를 사랑하는 친절한 국민
가)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온화한 마음 지닌 국민
나) 말다툼은 잘 하지만 치고 받는 싸움은 보기 힘이 들고, 주먹을 먼저 사용하면 심한 경우 살인미수로 고소할 수 있음
다) 부모를 잘 공경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미덕으로 여긴다.
2. 전통과 과거를 중시(보수적)
가)아직도 대가족 제도가 근간임, 여성은 전통 복장이 많음
나)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많이 제한됨
다)결혼에 당사자의 의견은 반영되기 어렵지만, 카스트, 사회적 지위, 종교가 같으면 배우자 선택에 관한 의견을 낼 수 있다.
3. 지위 및 직위의 사회
가)다른 사람에 대한 행동과 태도는 나이, 지위, 직업에 따라 다름
나)부친의 직업을 통해 상대방의 지위를 파악함. 따라서 비즈니스 시 부친의 직업을 물어볼 경우에는 군인, 관료 교수 등으로 대답하는 것이 카스트를 고려하는 상대방의 질문에 부응하여 주는 것임
다) 나이, 대학의 학위, 직업순위가 지위를 결정하는 요소이므로 박사, 석사 등의 학위와 군복무시 계급 등을 명함에 명기하고 호칭 시에도 사용함.
4. 시간관념
가)시간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으며, 약속시간에 늦어도 화를 내는 경우가 드믈다.
나)사람들의 행동은 느리나 일은 매우 잘함.(단 운전할 때는 매우 성급함)
5.사회법규가 까다롭고 복잡하지만 제대로 지키지는 않음
가)법규가 까다롭고 복잡하나 상충되는 점이 많아서 법규를 잘 아는 사람은 비교적 빠져나가기 쉬움,
나)모든 절차는 서류상으로 진행되는데 인도인들의 문장 실력이 뛰어나므로, 잘못이 있을지라도 서류상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할 경우가 있음. 서류를 잘 살펴야함.
★경제여건
경제: 농업국으로 국민소득의 40%가 농업소득이며. 국민의 70%가 농민이다. 그러나 경지면적도 농업기술도 낙후되어 농업생산성은 2648억$(1992)이고,1인당 국민 총생산도 $350 수준이다. 한국과의 교역에서, 한국은 약 4억 2400만$의 무역흑자를 기로하고 있다(1989)
★인도의 음식 4
인도에서는 채식주의와 비 채식주의가 엄격히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인도 음식에 반드시 끼어 나오는 (마살라)가 문제다. 식물의 열매와 씨앗 혹은 잎사귀와 뿌리로 만든 향신료로서 그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일종의 양념이면서 반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살라) 냄새는 우리에게 굉장히 역겹게 느껴져 이 향신료의 냄새가 인도 음식냄새로 여겨진다.
이 들의 주식은 차파티와 난이 있는데, 정제된 밀가루를 발효시켜 철판에 구우면 약간 부푸는 것으로 차파티 보다는 고급이다. 또 푸리는 차파티처럼 철판에 굽지 않고 기름에 튀긴 것.
하지만 맛살라는 인도 사람들의 체온을 조절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대 큰 역할을 한다.
★인도의 물
인도에서는 수돗물은 석회질이 많아 먹으면 이내 복통과 설사를 일으킨다. (꼭 물을 조심해야한다.
★결혼식
해가 지면 요란한 음악과 형광등을 들고 신랑 친구들이 줄지어 신부집으로 초대된다. 이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의 성스러운 결합을 뜻하는 예법으로 모든 비용은 신부측에서 부담한다.
결혼식이 끝나면은 바로 신랑집으로 가지 않고 신부의 안정을 위하여 당분간 신부의 집에서 머문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도 점차 현대화되면서 점차 변하고 있다.
지금은 여성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면서 인도의 악습인 지참금제도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결혼식은 하나의 축제로 간주하여 약 일주일간을 동네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다.
★장례식
지방마다 카스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나무 들것에 꽃과 음악이 곁들어지고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등 색옷을 입히거나 덮고 화장을 하러 간다.
불에 태운 뼈는 그곳이 강가라면 강에 넣고 강이 아니면 항아리에 넣어 갖고 갔다가 다음날 갠지스강 그 지류 등 물에 떠내려 보낸다. 강이 없는 곳에서 조장을 많이 하는데, 일생 동안 남의 살을 먹고 자란 것을 남에게 보시한다는 생각에서다.
최고의 장례식은 성스러운 바라나시 강에서 백단향 나무를 이용하여 화장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의 소망으로 여기고 있다.
MAHARASHTRA 5
* 수도 - BOMBAY
* 주요 언어 - MARATHI
MAHARASHTRA주는 인도 대륙의 중부에 걸쳐 폭넓게 펼쳐진 DECCAN고원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이다.
데칸고원은 마하라쉬트라뿐만 아니라 안드라 프라데쉬. 카르나타카 지역의 대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마하라쉬트라 지역이 점하고 있는 데칸고원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바위들이 많다.
따라서 동굴들도 많아서 전국적으로 1200여 개가 조성되어 있는 동굴사원들 중 1000여 개가 이곳 마하라쉬트라 지역에 조성되어 있다.
인도 동굴사원들 중의 압권인 그 유명한 ELLORA, AJANTA 동굴도 이 지역에 널려 있는 1000여 개의 동굴 중 일부인 것이다.
17세기에 마하라쉬트라를 기반으로 일어섰던 MARATHA 세력은 당시 전 인도를 장악하다시피 했던 거대한 무굴제국에 비하면 작고 왜소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SHIVA CHATRAPATI로부터 시작되었던 이 마라타 세력은 아우랑제브의 무굴과 대적하여 독립을 유지해내어,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라타의 영웅들은 인도 힌두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또한 마하라쉬트라 지역의 서쪽 끝에 위치한 BOMBAY가 나라의 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여, 마하라쉬트라 지역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신들이 나라의 중심세력임을 자처하고 있다.
BOMBAY
오늘날에 있어서 인도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어 있는 봄베이는 그러나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아라비아 해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COLABA, MAHIM, PAREL, WORII등 7개의 작은 섬들에 불과한 지역이었다. 이 섬들은 1661년 포루투칼의 공주가 영국의 찰스 2세에게 시집가는 지참금으로 영국으로 관할권이 넘어갔는데, 포루투칼은 1534년 당대의 큰 세력이었던 GUJARAT의 SULTAN으로부터 이 작은 섬들을 양도받았었다.
1668년 영국 정부로부터 이 작은 섬들을 대여 받은 동인도 회사는 1687년 구자라트 지역의 수라트에 있던 그들의 인도 본부를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봄베이를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61-1865년에 있었던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하여 세계시장에서 면(綿)이 부족하게 된 사태가 벌어져 인도의 면이 각광받기 사작할 무렵, SUEZ 운하가 개통이 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은 인도와 유럽을 연결함에 있어서 남아프라카 대륙을 돌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동인도 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봄베이의 무역상들은 폭발적인 호경기를 누리며 황금더미 위에 오르게 되었다.
봄베이를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이 같은 황금의 호경기를 타고 7개의 섬들이 하나로 묶이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고,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는 영국식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던 것이다.
그 이후 봄베이는 인도의 경제를 장악하는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다.
1993년 초 봄베이의 주요 건물들이 폭발물에 의해 파괴되며 참혹한 희생자를 발생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92년 12월에 AYODHYA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파키스탄 테러단의 사주를 받은 강경파 회교도들이 저질렀던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 폭발사고는, 봄베이와 인도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한동안 봄베이에 외국인의 발길을 뜸하게 만들었었다.
오늘날의 봄베이는 개방정책을 추진하며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인도의 견인차와 같은 곳으로, 경제적으로는 더욱더 분주하고 중요한 곳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봄베이는 인도의 어느 곳보다도 서구적인 도시이다. 중심지에 들어선 건물들의 서구적인 면모도 그렇지만, 이곳에 사는 중상층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인도의 어느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따라서 인도의 여러 곳을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봄베이는 인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에 밝은 곳답게 봄베이 일대에서 가장 인기 있게 숭앙되는 신은 부(富)의 신(神)인 GANESH이다( 시바 신의 아들이다)
코끼리 머리를 가진 이 가네쉬 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8/9월의 GANESH CHATURTHI는
굉장한 열기를 진행되는 봄베이 최대의 축제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축제기간 동안 각자의 집에서 모시고 있던 크고 작은 신상들을 얾겨 물에 버리는 수장식이 행하여지는데,
각 집단들이 신상을 들고 물로 향하는 행사는 장관이 아닐 수 없다.
* GATEWAY OF INDIA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는 1911년 영국의 GEROGE 5세와 그의 부인이 봄베이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구조물로 1924년에 완성되었다. 인도가 배를 통하여 유럽과 연결되었던 때의 도선장에 위치한 이 문은 당시에는 그야말로 인도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상적인 조각들을 가진 동굴사원이 있는 ELEPHANT ISLAND와 봄베이를 잇는 관문 노릇을 하는 게 고작이다.
* ELEPHANTA ISLAND 6
게이트웨이 인디아에서 11KM쯤 떨어져 있는 이 섬에는 450-750년에 걸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동굴사원들이 있다. 이 동굴사원에는 여러 가지의 조각들이 있는데 그중 창조의 신 BRAHMA, 유지의 신 VISHNU, 파괴와 재생의 신 SHIVA가 각각 묘사되어 있는 3면의 얼굴을 가진 TRIMURIT 상이 이 동굴사원 내의 조각들 중 압권인데, 보면 볼수록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섬은 원래는 GHANAPURI로 불리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코끼리 섬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34년 이곳을 장악한 포루투칼 병사들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동굴사원 앞에는 실물 크기의 코끼리 상이 있었는데, 이들 병사들이 까다로운 인도식 발음보다는 이 코끼리를 섬의 이름으로 삼아 지칭한 것이다. 문제의 이 코끼리는 현재 빅토리아 공원 안의 박물관 앞에 옮겨져 있다.
동굴사원 안에는 많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포루투칼 병사들이 사격연습 대상이 되어 그 중의 많은 것들이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그 생생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조각들이 많이 있다.
* PRINCE OF WALES MUSEUM
꼴라바 구역의 웰링던 광장 옆에 자리한 INDO-SARACENIC 형식의 건물에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이다. 넉넉한 정원을 두고 191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후일 GORGE 5세가 된 웨일즈 왕자의 인도의 방문을 기념하여 지은 것이다.
미술관에는 많은 세밀화들이 (MINIATURE) 수집되어 전시되어 있고, 고고학실에는 GHANDARA 시대의 아름다운 불상과 힌두의 조각들을 지니고 있다. 한편 자연관에는 동물들의 박제가 전시되어 있다.
* JEHANGIR ART GALLERY
근대 작가들의 작품이 계속하여 전시되고 있는 자항기르 미술관은 인도 현대 미술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 마린드라이브 MARINE DRIVE
영국 여왕의 목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마린드라이브는, 뭄바이의 부의 상징이다 .
해변을 따라서 고급 아파트들과 고층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인도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와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이국적인 풍모를 자랑하고 있다.
* 아잔타 석굴 ( AJANTA CAVE)
데칸고원의 북서쪽 아우랑가바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4KM 떨어진 곳에 있는 불교 동굴이다. BC2세기-AD7세기까지에 걸쳐 와그라강을 사이에 두고 석벽에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말발굽형으로 강줄기를 그리는 와그라강을 따라서 600M에 걸쳐서 30개의 동굴이 있으며 벽에 그린 회화나 조각들로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잔타 석굴은 와그라의 반달모양의 침식 단애를 파서 건축 조각한 것이다.
굴은 총 29개가 있다. 이들 석굴은 편의상 서쪽의 입구부터 번호를 붙였다 . 편의상 서쪽의 입구에서부터 번호를 붙였는데 시대의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대와 석굴의 번호가 일치하지 않는다. 제8굴에서 제13굴까지의 석굴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기원전 2세기의 제6.7굴이다.
제14굴에서 제20굴까지는 5세기의 굽타시대에 각각 만들어진 것이라 하며 나머지는 7세기때의 작품이다.
* 엘로라 ( ELLORA CAVE)
오랑가바드 북서쪽의 약 30KM 되는 곳에 있는 석굴 사원군이다.
아잔타와 함께 인도 종교예술의 보고이다. 언덕 중턱 약 3KM에 걸쳐 불교, 힌두, 자인교의
석굴사원이 만들어져 있다.
1-12굴은 4-7세기에 조성된 불교사원이며, 13-29굴은 6-8세기에 조성된 힌두 석굴이다.
30-34굴은 8세기 이후에 조성된 자이나교 사원이다.
A) 불교 쇠퇴기에 만들어진 제1-12굴
엘로라 석굴의 가장 남쪽에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무렵에 만들어졌다.
제1-10굴은 7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고, 11굴과 12굴은 8세기에 만들어졌다.
대부분 비하라라고 불리우는 승원이며, 가장 큰 것은 5굴이다.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11굴과 12굴은 힌두의 영향을 받은 형태가 엿보인다.
B) 엘로라 최대의 볼거리이며,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위대한 유산 16번굴과 함께 29번까지가 힌두석굴이다. 시바신을 위시해 여러 힌두신들을 모시고 있고 만들어진 것은 9세기이다.
7
C) 상상을 초월한 대건축 카알리사나트 사원
중부 인도에 있으며, 4세기-8세기를 걸쳐서 완성된 사원으로서 모두 하나의 바위산에
조각되어져 있다. 구조는 바위산을 위에서부터 정으로 쪼아서 하나의 테마로 조각한 사원이다.
크리슈나 1세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원으로서 남부 드라비다족들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굴의 규모는 깊이 83m, 폭46, 높이 35m 나되는 하나의 거대한 조각이다 .
내용은 힌두신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2대 서사시 라마야나, 마하바랏트를 주재로 하고 있다. 그외에 다양한 힌두 신들을 묘사하고 있는 인류 최대의 조각품이라고 한다.
D) 자이나교 석굴군 제30-34굴
카알리사나트에서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자이나교 석굴군이다.
다섯 개의 석굴은 에로라 석굴군의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가장 번성했던 힌두교 석굴들처럼
힘찬 느낌은 들지 않지만 , 자인교 특유의 섬세함과 종교의 특성을 알 수가 있다.
MADYA PRADESH
* 수도 : 보팔
* 주요 언어 : 힌디
마드야 푸라데쉬 주는 인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주이다.
지리적으로 인도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지역은 SANCHI에 인상적인 탑을 남겨 놓은 ASHOKA 왕이 속한 마우리아 왕조 때부터 인도의 중요한 도시로서의 역할을 해왔었다.
MUGHUL 제국에 이르기까지 존속되어 오며 인도 역사의 한몫을 담당한 MALWA 지역은 현재의 라자스탄 주에 속하는 일부의 지역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대부분이 마드야 프라데쉬 지역을 무대로 하는 것이었다.
11세기에 찬델라 왕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KHAJURAHO의 유물들과 15세기의 유물인 만두의 유물은 싼치의 유물과 함께 이 지역이 자랑하는 유물들인데, 이밖에도 괄리아르의 성과 같은 볼 만한 유물도 소유하고 있어, 마드야 프라데쉬는 이 같은 유물들을 이용한 관광사업에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찍 눈을 뜬 주이다.
* BHOPAL : BHOPAL은 RAJA BHOJ에 의하여 BHOJAPAL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팔이 오늘과 같은 호수를 낀 도시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세기 초기로, 아프칸 출신의 병사라는 신분에서 출세하여 MUGHUL 제국의 영주가 되어 이곳을 관할하고 있었던 도스트 모하메드 칸에 의해서였다.
이 병사 출신의 행운아는 아우랑제브의 죽음이후 무굴 제국이 급속히 붕괴 되어가는 틈을 타서 자신이 영주로 있던 지역을 볼모로 하여 왕으로 독립하는 민첩성을 발휘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보팔은 오늘날에도 기틀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보팔은 크고 작은 두 호수를 두고 구 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구 시가지엔 1818년에서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강력하게 군림했던 BEGUM들이 머물던 궁전들과 거대한 회교사원 그리고 온갖 것들이 얽혀 있는 BAZAAR가 있다.
한편 신시가지에는 마드야 푸라데쉬 주의 수도로서의 면모를 보이려는 듯 새로 들어선 건물과 상가들이 널찍한 도로를 두고 형성되어 있어 보팔을 방문하여 구 시가지를 들렀던 사람들에게 판이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보팔이라는 이름을 세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만든 것은 1984년 12월 2일 밤의 비극이다. 구 시가지의 북쪽에 위치한 공업 지구 안에 자리잡고 있는 건전지를 만드는 미국 UNION CARBIDE 회사의 인도 공장에서 화학물질을 저장한 탱크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강력한 유독성 가스가 보팔 일대를 덮어 수천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즉사하는 처참한 참사가 빚어진 것이다.
이 처참했던 참사는 그날 밤의 주검들 이외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후유증으로 인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회교사원들 (NO)
* TAJ-UL MASJID :이 사원은 인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회교사원 중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핑크빛으로 단장되어진 이 사원이 처음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 SHAH JAHAN BEGUM에 의해서 지만, 완공은 1971년에야 이루어진 것이다.
* SANCHI 8
SANCHI는 아쇼카 대왕이 B C2-3세기경 세운 탑 등이 남아있는 불교 유적지이다. 북인도의 불교 유적지와는 달리, 석존 개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아쇼카 이후 수세기에 걸쳐 사원과 탑이 조성되었던 곳으로, 그 중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해감에 따라 오랫동안 잊혀졌던 싼치는 1818년 한 영국인에 의해서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나 싼치는 처음으로 체계화된 조사팀에 의하여 탐사되기 전까지, 도굴자들은 물론이고 발굴 초보자들에 의하여 망가지고 훼손되었다.
1912-1919년간에 걸친 영국의 JOHN MARSHALL 경이 이끄는 팀에 의해서 오늘날처럼 정리되고 복원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싼치는 인도의 대표적인 불교의 유적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 SUTUPA 1 (첫째 탑) : 1번 스튜파는 이곳의 대표적인 유적이자 싼치의 상징이다. 처음 조성하기 시작 한 것은 아쇼카 왕이지만 완성되기는 BC 3세기나 2세기경이다.
탑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석존과 관계된 일화들이 조각된 4개의 문 (TORANA)를 가지고 있다. 애초에는 벽돌로 쌓인 탑이지만 후대에 돌로 덮이면서 현재와 같은 외양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지름으로 길이 16.4M, 높이 36.5M이다.
석존은 자신의 모습 등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말씀을 남겼는데, 이 탑은 이 같은 석존의 유지에 충실하였던 초기의 불교 작품이다.
따라서 각 문에 새겨져 있는 조각들은 석존을 직접 묘사하지 못하고
연꽃은 그의 탄생, 보리수 나무는 그의 깨달음, 바퀴는 그의 가르침, 발자국이나 자석 등은 그의 임재를 나타내는 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동문: 기수가 없는 말로서 석존의 임재를 나타낸 출가 장면, 석존을 임신하고 달 위에 선 코끼리 꿈을 꾸는 마야 부인, 석존의 열반등이 묘사되어 있다. 한편 천장의 한쪽에 새겨진 YAKSHIKA 상도 널리 알려진 것 중의 하나이다.
서문 : 석존의 일곱 전생을 묘사하면서 그의 임재가 4번은 나무로 3번은 탑으로 상징되어져 있고, 한 기둥의 뒤편에 석존을 유혹하는 MARA가 묘사되어 있어 주목되는 문이다.
남문 : 석존의 탄생과 아쇼카 왕의 불교 신도로서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북문 : 보존상태가 가장 졸은 곳이다. 석존의 탄생을 묘사한 장면과 원숭이로부터 꿀을 공양받는 장면 그리고 석존이 펼치셨다고 일컬어지는 이적들을 묘사한 것들이 새겨져 있는데, 석존의 가르침에 귀의함을 뜻하는 바퀴와 함께 새겨져 있다.
* STUPA 2 & 3 : 둘째 탑은 언덕의 정상에서 서편으로 500M 가량 내려가 있어 놓치기 쉬운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 탑은 동물과 꽃들이 사람을 묘사한 조각과 어우러져 있어 흥미로운 탑인데, 이 탑은 B 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탑은 첫째 탑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첫째 탑과 비슷한 형태지만 그보다는 작은 규모인데, B C 150-140년의 것이다.
이 셋째 탑은 부처님의 두 큰 제자인 사리불 사리푸트라과 목련불 모드갈야나 가 모셔져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들 유회는 1853년 영국으로 옮겨졌다가 1953년 다시 인도로 반납되었는데, 반납된 이 유회를 모시기 위해 언덕 위 한쪽에 사원을 지었다. 물론 유회는 이 사원에 모셔져 있다. 아쇼카 왕에 의해서만 8개가 지어진 탑들은 작게는 1M 정도의 높이를 지닌 것으로부터 크게는 첫째 탑의 규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그중의 여러 개가 언덕 부근에 흩어져 있다.
* PILLARS (기둥들 ): 이곳의 기둥들은 아쇼카 왕에 의해 세워진 그 유명한 기둥들 중의 하나에 속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곳에 남아 있는 기둥은 원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아 밑 부분은 첫째 탑의 남쪽 문 옆에 남아 있고 윗 부분은 언덕 아래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둥의 정상에 얹힌 각기 다른 방면을 쳐다보고 앉아 있는 3마리의 사자상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박물관에서 볼 수가 있는데, 인도의 국장이며 돈에도 새겨져 있어 눈에 익은 사르나트의 사자상과 흡사하다.
9
* TEMPLES & VIHARAS : 첫째 탑의 남쪽에 있는 신전들 중 NO 40은 아쇼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그 규모가 크다.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NO 6 현 관과 중앙의 신전이 연결되는 형식은 후대에 조성된 KHAJURAHO와 오리샤 주의 힌두 신전들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 있다.
한편 7세기경의 것인 NO 18은 전형적인 그리스 형식의 기둥을 가지고 있어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다.
동쪽의 언덕 끝에 자리잡고 있는 사원 NO.45. 47은 힌두 양식이 많이 섞여있어 불교의 말기에 조성된 것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서쪽의 둘째 탑으로 가는 길에는 약간 옆으로 비켜나 있는 NO 51은 한쪽에 큰 바위덩어리를 깍아서 만든 대접이 있어 주목받고 있는데, 이것은 승려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 박물관 : 아쇼카 왕이 세웠던 기둥이 세 사자상의 있는 윗 부분등 싼치 일원에서 수집된 것들이 보관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규모는 작지만 눈여겨볼 만한 곳이다.
* 델 리 (DELHI)
델리는 고대로 부터 여러 왕조가 흥망했던 도시로 서방에서 온 침략자가 풍요로운 힌두스탄 평원으로
의 진출을 위해 발판으로 삼았던 곳이어서 흰두문화와 이슬람문화 두 문화의 혼합 일치가 델리의 참
모습이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인도 지배의 본거지가 되었던 땅이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1857년에는
영국 지배에 대항해 대 반란을 일으킨 애국자들과 조국의 무력 해방들 목표로 한 찬드라 보스의 국민
군이 격렬한 투쟁 끝에 쟁취한 미래를 꿈꾸는 도시인 것이다.
인도의 수도이기도 한 델리는 RIVER YAMUNA의 평원에 발달한 인구 850만명이 넘는 중앙정부 직할령
UNION TERRITORY 이다. 도시의 성립은 고대 인도부터이지만, 수도로서는 12세기부터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녹음 속의 현대도시 뉴델리는 1912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역사의 그늘이 짙은 올드
델리는 활기에 넘치는 서민의 거리로 숨쉬고 있다
올드 델리에서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유자적한 모습에 잠깐 일상 생활을 벗어난 인간본연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
뉴델리의 중심이 되는 둥근 광장, 상점과 정부관광국, 항공사 은행 등이 밀집되어 있는 코노트 플레
이스의 동남쪽 2.5KM지점에 있으며 지도를 보면 이곳을 중심으로 몇 줄기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
있어 마치 도시의 또 다른 중심처럼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병사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31년에 완성되었으며. 1972년에는 인도독립 25주년을
기하여 불멸의 불이 점화되었다.
이 전쟁을 참가하는 조건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 받았지만은 전쟁 후 아무런 약속도 지키지
않아서 영국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넓게 뻗은 도로 때문에 인도 사람들의 데이트 코스로 시민들의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쿠타브미나르(QUTAB MINAR)
뉴델리에서 남쪽으로 약 15km 지점의 넓은 평원에 높이 73m , 귀저부의 지름이 14,5m의 독특한 탑이
있고 5층 중 아래 3층은 적사암이며 그 위는 대리석과 사암으로 지어져 있고, 코란의 문구를 도안한
조각이 외벽에 새겨져 있다. 원래는 노예왕조의 술탄인 굽타우딘 아이바크가 힌두 교도에 대한 승리
를 기념하여 1199년에 건축한 것으로 후에 그의 사위인 샴슈딘 일투미쉬가 완성하였다. 원래는 꼭대
기까지 관람이 가능하였지만은 1992년의 학생단체들 사고 이후 탑에 오르는 것은 금지되었다. 각층
사이에 발코니가 있고, 내부는 나선형의 379계단으로 되어있다. 부지 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문으로 알라이 디와자가 있다.
이 문은 회교, 힌두교, 자인교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형테를 취하고 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정교한 조각과 문향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이 사원의 마당에 굽타
왕조의 것으로 추정이 되는 쇠기둥이 서 있다. 높이는 7.2M이며 순도 100%를 자랑하면서 아직까지도
녹하나 슬지 않고 있다.
당대에 순도 100%의 쇠기둥을 만들 수 있었는지 지금도 확연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자마마스지드(JAMA MASJID)
이 모스크 돔과 높은 첨탐은 랄킬라의 붉은 성벽과 함께 무굴 시대의 델리를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
이다. 성과 마찬가지고 샤자한의 명령에 의해 세워졌는데 1658년에 완성되었다. 인도 최대의 모스
크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손꼽히는 크기이며 또한 이것은 건축광 샤자한의 최후 걸작이기도 하
다.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이 조화된 아름다움이 있고 학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넓은 경내는 성지
메카를 향한 이슬람교도의 예배가 거행되는 성역이다. 입구는 모스크 북쪽의 넓은 돌계단 위에 있는
문이다. 지금도 2만여 명이 동시에 알라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살아 있는 신전이다.
*간디기념당(GANDHI SMARAK SANGRAHALYA)
인도 건국의 아버지, 간디에 관한 자료, 유품, 사진 도서가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사진을 보면
항상 민중에 둘러 쌓여있고 때로는 고독하게 고뇌하는 간디의 표정, 최후의 순간에 입고 있던 검소한
의복이 가슴을 울린다. 도로 맞은편 라지가트에는 간디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인 오, 신이여! 가 비에
새겨져 있다. 지금도 시민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랄킬라 ( RED FORT)
무굴제국시대(1639-1648)에 건립 빨간 사암으로 건축된 성벽이 인상적이며 일명 빨간 성이라 한다.
지금은 비록 조잡해 보이지만 예전에는 지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라고 했었다. 현재
모습이 변한 것은 영국점령군에게 수없이 침략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는 보석과 귀금속으로
장식되고 아름다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궁전 안으로 연결된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므로 그곳에서 안락하게 살던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천국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오른쪽 박물관에
는 무굴제국 시대의 회화와 무기 등이 전시되어져 있다. 여러개의 문을 가지고 있는대, 중요한 문이
메카를 향하고 있다고 하여 라호르 게이트라고 한다. 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던 DIWAN-I-AM, 왕이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던
DIWAN-I-KAS, 무굴시대의 목욕탕인 HAMMAN, 왕의 거처인 KHAS MAHAL, 하얀 색의 꽃들로 채워진
MEHTAB BAGH, 왕비의 거처인 RANG MAHAL등이 있다.
AGRA
아그라는 힌두의 대서사시 MAHABHARATA에 천국의 정원이라는 뜻의 AGRABANA 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그러나 만일 아그라에 TAJ MAHAL이 없다면 아그라는 인도에
숱하게 널려 있는 역사 깊은 도시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아그라의 운명을 바꾼 타즈 마할을 세운 회교세력가 아그라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501년
으로, 이즈음에 강력한 세력으로 부각한 술탄 SIKANDER LODI가 이곳을 수도지로 정하므로 서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MUGHUL제국의 수도가 된 아그라는 AKBAR에 이르기까지 무굴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로 존속해오며 인도 천하의 중심지로 군림하였었다.
아그라에 온갖 영화를 안겨주었던 거대한 무굴제국은 JAT과 MARATHA세력 그리고 영국과의 충돌기간을
거치면서 몰락해갔고, 무굴 제국의 몰락과 함께 아그라의 영화도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아그라는 무굴 제국의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인 타즈 마할로 인해 인도 최대의 관광지
가 되었다. 델리의 남쪽으로부터 240KM밖에 떨어지지 않아서 여행자들이 방문하기에 편리한 아그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매력이 넘치는 도시인 라자스탄 주의 JAIPUR와 함께 삼각을 이루는 위치상의 이점
도 있어서, 한층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이는 것이다.
TAJ MAHAL
주의: 금속성물질, 라이터, 담배 , 과자,사탕 등등 일체 소지하고 입장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통하여 타즈 마할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글을 통해
서 이미 타즈 마할과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타즈 마할은 샤 자한이 17년의 결혼기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의 아이를 낳으려다 1629년
에 세상을 떠난 부인 MUMTAZ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무덤이다. 1631년에 짓기 시작하여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를 둔 전형적인 무굴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 있다.
타즈 마할의 뒷편으로는 YAMMUNA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강 쪽의 뒷면을 제외
한 타즈 마할의 삼면은 모두가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을 위한 불멸의 금자탑은 이란의 SHIRAZ 출신의 USTAD ISA에 의해서 설계된 것인데, 그의 설
계대로 만들기 위해서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차출된 장인들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건축을 위한 자재로는 운반을 위해서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야 했던 라자스탄의
MAKRANA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해야 했던 여러 가지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엄청나 규모의 준비과정과 장인들을 동원하여
만든 타즈마할의 건축비는 당시의 돈으로 500만 루피였다고 한다. 타즈마할을 이루고 있는 대리석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서 다른 색감을 보여서 아침과 한낮 그리고 석양 무렵의 느낌이 다르고, 달빛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 따라서 타즈마할의 마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들락거리며
각기 다른 모습의 타즈마할에 넋을 잃곤 한다. 세상이 평안했던 시절이 달 밝은 보름달 무렵이면은
타즈 마할을 자정까지 공개하여 달빛에 비친 은색의 향연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지만, 요즈음처럼
어지러운 세상에 이 같은 호사가 허용될 리가 없다. 달빛 아래 요염한 자태로 선 타즈 마할의 모습을
살짝만이라도 보고 싶다면, 부근에 있는 높은 건물에 오르는 방법뿐이다.
부인을 위해서 만든 이 하얀 대리석 무덤에 버금가는 규모로 자신의 무덤을 검은 대리석만으로
야무나 강 건너편에 짓고, 두 무덤 사이를 구름다리로 이으려는 샤 쟈한의 계획이 있었다는 속설이
있다. 샤 쟈한의 건축에 대한 집착을 짐작케 하는 흥미 있는 일화라고 할 수가 있다.
당시에 타지마할을 만든 장인들은 샤 쟈한에 의해 오른손이 잘리었다고 한다. 다시는 이 같은
건물을 만들 수 없도록 하는 욕심에서 였다고 한다.
지금도 아그라 근처에는 타지마할을 만든 장인의 후예들이 공예품등을 만들어서 전시하고
판매하고 있다, 오직 장인의 후예만이 공예품을 만들 수 있도록 정부에서 지정하고 있다.
FATEHPUR SIKRI
무굴 제국의 황제 중 가장 흥미 있는 인물이라 할 AKBAR에 의해서 세워진 파테푸르 시크리는 괄목할
만한 유적들을 지닌 곳이지만은, 지금은 유령들이 설치는 곳처럼 방치되어 있는 곳이다. 아크바르가
이곳에 도시를 만들게 된 까닭은 800여 명의 여인들로 채워진 아방궁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뒤를 이를 사내아이를 만들지 못했던 20대 황제로서의 고민을 아크바르가 회교 수행자인 SHEIKH
SALIM CHISTHI에게 털어놓고, 그에게 아들을 점지해달라는 부탁으로 시작되었다.
원하는 아들을 하나뿐 아니라 셋이나 얻을 것이라는 성자의 예언을 들었던 아크바르는 이듬해 AMBAR
의 라지푸트의 딸인 JODHA BAI로부터 기다리던 첫 아들을 비롯하여 두 아들을 더 얻게 되자, 기쁨을
참지 못하고 1565년 그의 이상에 맞는 새 도시를 성자가 사는 곳의 옆인 지금의 자리에 짓기 시작하
였다. 성자의 이름과 같은 SALIM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이 첫 아이가 바로 천신만고의 과정 끝에 겨우
왕권을 계승하는 데 성공했던 JEHANGIR였다.
1573년 아크바르는 구자라트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승리의 도시‘ 라는 뜻의 FATEHPUR라고 이름을
고치며 새로 지은 이곳을 수도지로 삼았다. 그러나 16년을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머물던 아크바르는
북부의 소란상태를 계기로 하여 수도를 LAHORE로 옮겼다가 1599년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을 때, 충분한 물을 공급받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파테푸르를 기피하고 아그라를
수도로 택하였다.
이로써 온 나라 안의 현인들과 서로 다른 종교를 배경으로 가진 사람들 그리고 갖가지 예술인들이 모
여서 붉은 사암을 이용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무대로 활발한 토론과 열정적인 공연이 벌어
졌던 파테푸르 시크리는 아크바르 당대에 이미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 BULAND DARWAZA :
높이가 54M에 달하는 대규모의 것인데다 가파른 층계를 두고 있어 밑에서 올려보면은 솟아오른 듯한
느낌을 주는 승리의 문 블랜드 다와자는 아크바르가 구자라트에서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문이다.
* JAMI MASJID
큰 규모의 회교사원 자미 마스지드는 승리의 문을 입구로 삼고 있는데, MECCA의 것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사원의 마당 한가운데쯤에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보석처럼 박혀 있는 건물이 바로 아크바르
에게 아들을 점지했던 수피 성자의 무덤이다. 성자가 즐겨 명상했던 자리에 아크바르가 세웠다는 이
무덤은 샤 자한이 피에트라 두라 기법을 이용한 장식을 첨가했는데, 지금도 아이가 없는 여인들의 순
례가 끊이질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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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전 구역
회교사원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로 5분쯤 길을 걸어가면 궁전 구역으로 들어가는 역할을 하는 SHAHI DAR-WAZA (왕의 문) 가 나온다. 왕의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JODHA BAI PALACE이 있다. 이 조바 다이 궁전은 바로 제항기르을 낳은 힌두의 왕비 조바다이를 위한 것이었다.
조바다이 궁전 옆에 있는 BIRBAL BHAVAN은 아크바르 궁전의 9개의 보석 중의 하나로 꼽히는 힌두의 재상 RAJA BIRBAL을 위한 것이었거나, 아니면 라자 버발에 이하여 세워진 것으로, 프랑스의 작가 빅톨 위고는 이 건물을 작은 규모의 궁전이 아니면 큰 보석상자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버발 바반 옆에는 GOA 출신의 기독교인으로서 아크바르의 부인들 중 하나였던 MARYAM 이 머물던 작은 궁전인 GOLDEN PALACE가 있다.
재미있는 구조의 5층 건물인 PANCH MAHAL은 왕과 아방궁의 여자들이 회동을 즐겼던 곳으로, 지금은 벽이 남아 있지 않지만 원래는 돌로 벽이 쌓여 수십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판츠 마할 곁에 있는 ANKN MICHOLI는 숨바꼭질이라고 번역되는 이름 그대로 왕이 후궁들과 숨바꼭질을 하였다는 곳이다.
판츠 마할 옆에 넓은 마당을 두고 있는 DIWAN-I-KHAS는 아크바르가 종교인들 혹은 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던 장소로, 연꽃 문양을 이용한 상징적인 의미들을 지닌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DIWAM-I-AM은 아크바르가 국정을 보았던 곳이다.
VARANASHI
PLEASE NOTE: 바라나시에서는 화장터를 향해서는 어떠한 사진도 찍을 수 없습니다.
위반시 USD500벌금과, 카메라 빼앗김
바라나시는 SHIVA 신과의 연관으로 인하여 더욱 성스럽게 여겨지는 이 갠지스 강을 끼고 3000여 년 이전에 형성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단절됨이 없이 번잡한 도회지로 이어져오는 곳으로, 원래 빛나다 라는 뜻의 KASHI로 불리어온 곳이다. 바라나시라는 오늘날의 이름은 시 의 북쪽과 남쪽에서 각각 흐르고 있는 VARNA강과 ASSI 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영국이 통치하던 시절에는 BENARES라고 영어식으로 표기되어, 지금도 KASHI와 함께 이곳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존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처음으로 법을 펼친 SARNATH도 이곳 바라나시의 영역으로, 바라나시의 시가지에서 1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다.
3000여 년을 이어온 힌두 성지로서의 바라나시는 석존 때 번성했던 불교의 세월과 11세기 무렵의 이곳으로 진출한 MUGHUL제국까지 이어진 회교의 세월을 겪으며 많은 것이 바뀌는 시련을 넘겨야 했는데, 특히 무굴 제국의 말기인 AURANGZEB 시대에는 거의 모든 바라나시의 사원들이 파괴되거나 회교 사원으로 바뀌는 곤욕을 치르어야 했다.
무굴제국의 몰락으로 1738년에 시작될 수 있었던 작은 힌두 왕조를 기점으로 바라나시는 다시 힌두권이 되었지만, 그 동안 이곳에서 자리잡고 있었던 회교세력과 공존해야 하는 입장에 있게 되었고, 두 종교가 엇갈려 있는 바라나시는 오늘날에도 양자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격렬하게 터지는 곳의 하나 이다.
종교를 토대로 한 도회지로서의 오랜 역사를 지닌 바라나시는 따라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자리하여 많은 인물들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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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과 강변의 갓트
GHAT란 육지에서 강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 계단 길을 말하는 것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며 남북으로 흐르는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것은 바라나시에 순례 온 사람들이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의식이어서 100여 개를 헤아린다는 갓트들이 바라나시 시가지와 연결되는 강의 서편에 줄을 지어서 설치되어 있다.
갓트의 대부분은 18세기에 이루어진 것인데, 그 중에는 JAIPUR, UDAIPUR, GWALIOR, MYSORE 그리고 바라나시 등 부유했던 힌두 왕조의 맥을 이은 마하라자들이 각자의 저택을 조성하며 만든 갓트들도 있다. 이들이 만든 갓트는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들이 궁전과 같이 공존하고 있다.
* DASASWAMEDH GHAT( 다사스와메드 갓트)
이 갓트는 100여개가 넘는 바라나시의 갓트들 중에서 대표적인 곳으로 중심부위에 있다. 창조의 신 BRAHMA가 열 마리의 말로 재물을 바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의 이 갓트는 바라나시의 갓트들 중에서 가장 바쁜 곳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바라나시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 장소이기도 하다.
* HARISHCHANDRA GHAT ( 하리쉬 찬드라 갓트)BY BOATING
규모도 적고 인기도 별로 없지만 나무를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기를 이용한 화장터가 이곳에 있다.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는 BURNING GHAT라고도 불리운다.
* MANIKANIKA GHAT ( 마니카르니카 가트)
바라나시를 대표하는 화장터로 이곳에선 시체들이 끊임없이 태워지고 있다.
갓트 주위에 가면은 물에 적신 시체들이 색색의 천들에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PANCHGANGA GHAT( 빤취강가 가트)BY BOATING
5개의 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라는, 이 갓트는 위편에 있는 ALMAGIR 회교사원은 힌두 VISHNU 사원을 없애고 지은 것으로, 아랫부분을 보면은 힌두의 흔적이 역력하다.
* MIR GHAT BY BOATING
미르 갓트 위에 있는 네팔사원의 안팎에는 성적인 형상의 조각들이 있다.
* 갠지스 강변의 골목길과 BAZZAR
석존은 물론 천민 출신의 회교도 신분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힌두 성자를 스승으로 삼는 특이한 전력의 KABIR와 같은 힌두교가 아닌 성자들도 바라나시에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시바신과 연계된 힌두 성지로서의 바라나시에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남긴 힌두의 성자들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바쁜 여행자의 걸음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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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LDEN TEMPLE/ VISHWANATH TEMPLE
PLEASE NOTE: 외국인은 입장할 수 없습니다.
황금사원으로 불리는 이 사원은 우주의 주인인 비슈베슈와라라고도 불리는데, 시바 신의 또 다른 형태의 신을 모시고 있는 것으로 강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의 건물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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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랑제부에 의해서 헐렸는데, 지금의 건물은 1776년 INDOOR 의 HOLKAR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힌두교인 만 들어갈 수 있다.
금으로 덧칠된 SHIKARA 형식의 지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금칠은 1835년 마하라자 란짓 싱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원의 뒷편에 있는 회교사원 GYANVAPI MOSQUE 는 아우랑제브 자신이 허물었던 비슈와나트사원 위에 지은 것으로, 사원의 뒷편과 초석을 보면 옛 힌두 사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1992년 말의 AYODHYA 사태 이후, 황금사원 옆의 이 회교사원은 MATHURA의 회교사원과 함께 힌두교인들에 의해 강제로 헐릴 가능성이 많은 곳으로 여겨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외부인은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
경찰들이 관광객의 숫자만큼 거주하면서 경비를 서고 있다. 길이 미로처럼 되어있어서 이곳을 여러번 방문한 사람도 길을 쉽게 잋어버린다.
* BHARAT MATA TEMPLE (N0)
기차역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사원은 일반의 힌두 사원들처럼 신상을 모신 것이 아니라 ,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인도 지도를 모셔놓고 ‘어머니 인도를 섬기는 사원이다’ 두 애국자의 기부에 의해서 지어진 이 사원이 개장된 것은 간디 MR.M.K.GANDHI 선생에 의해서였다.
인도가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되기 전의 지도를 볼 수 있다.
* RAM NAGAR FORT ( BY BOATING)
바라나시의 시가지와 갠지스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람 나가르 포트는 17세기에 세운 것이다. 바라나시의 마하라자가 머물던 곳으로 박물관을 마련해 그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 사르나트 鹿野苑 Sarnath
사르나트는 우타르프라데쉬 Uttar Pradesh주의 바라나시에서 12km 떨어져 있다. 힌두교의 최대 성지 중의 하나인 바라나시 지척이지만 바라나시의 혼잡과는 거리가 멀게 조용하고 한가한 곳이어서, 사뭇 색다른 맛을 가진 곳이다.
일설에는 브라흐닷타 왕이 이곳에 사슴들이 살도록 풀어놓았기 때문에 사슴의 동산 (鹿野苑)'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는 한쪽에는 아직도 사슴 몇 마리가 무리 지어 살고 있어 녹야원이라는 이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성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리쉬파타나라고도 불리었던 이곳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내용을 처음으로 세상에 펼친 곳이었다. 그러므로 사르나트는 석존과 깊은 관계가 있는 다른 세 장소-태어나신 탄생지 룸비니와 깨달음을 증득한 성도지 부다가야 그리고 세상을 떠나신 열반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법의 바퀴를 처음으로 굴린 초전 법륜지로서 불교의 4대 성지중의 하나이다.
깨달음을 증득한 석가모니께서 그 내용을 펼칠 대상으로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들은 한때 그가 스승으로 섬겼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였다고 한다. 그러나 특유의 신통력을 통해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 석가모니에게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들은 부다가야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같이 고행하며 수행하였던 다섯 도반들인 콘단나, 밧디야, 밥파, 마하나마, 그리고 앗사지였다고 한다.
구도를 위한 수행이라면 그 어떤 고행도 망설이지 않았던 구도자 싯달타를 수행의 귀감으로 삼고 따르던 이들 다섯 수행자들은, 싯달타가 극단적인 고행으로 점철되는 수행을 더 이상 진행시 키지 않겠다는 의미를 품고 강(江)가의 소녀 수잣타가 제공하는 우유죽을 먹는 것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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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을 깨뜨리게 된 타락한 수행자에게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것이냐는 탄식을 남기고 떠났다. ' 무상정각(無上正覺)' 과 고행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확연하게 증득한 석가모니로서는 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특유의 신통력으로 이들이 사르나트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석가모니는 오직 법을 나누겠다는 목적으로 250km가량의 길을 11일 동안 단신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이들을 교화하기 위해 사르나트에 오신 부처님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은 부처님께 인사조차도 하지 않을 것이며, 청한다면 앉을 자리를 내어주기는 하겠지만 일어서서 마중하지는 않을 것이며 혹시 법(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에, 다섯 비구는 부처님의 당당한 걸음걸이와 안온한 표정을 보고 도취되어 차례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맞이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불. 법. 승 삼보가 형성되었다.
사르나트는 아라한의 격지를 이룰 수 있게 된 다섯 수행자들에 얽힌 일화 이외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당시 어떠한 반향(反響)을 일으켰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야사 일행과의 일화도 간직하고 있다.
바라나시에 기반을 둔 부호의 아들로서 모자랄 것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야사는 어느 날 흥청거리던 잔치 끝에 골아 떨어 졌다 문득 깨어나 보니 죽은 듯 잠든 시녀들의 흉한 꼴을 목격하고, 이로부터 비롯된 메울 길 없는 혐오감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태였던 야사는 우연히 사르나트에 성자(聖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석가모니를 찾아오게 되었다. 석가모니에게서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밝히는 설법을 듣고 한량없는 평화를 얻게 된 야사는 같이 어울리던 친구 50명과 함께 계(戒)를 받고 수행자가 되었다.
또한 아들의 돌연한 출가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야사의 부모가 아들의 출가를 만류하러 쫓아왔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 그들 자신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재가행자(在家行子)가 되었다.
성도 이후 석가모니께서 보냈던 첫 번째 하안거 장소이기도 한 사르나트는 석가모니 멸후 마우리아, 굽타, 팔라 시대 등을 거치며 계속 번창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현장법사가 당도하였을 때 이곳은 1,5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불교와 관련된 학문과 예술이 융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몰락하면서 함께 잊혀지기 시작한 이곳은 1017년 바라나시를 점령한 회교세력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결정적으로 퇴락 하였다.
그러나 이 사르나트로부터 시작한 법은 지구 끝에 이르도록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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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나트 박물관 Sarnath Archaeological Museum.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유물을 모아 놓은 곳으로, 작은 규모에 비해서 뛰어난 소장품들이 많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아쇼카 석주의 상부에 안치되었던 4마리 사자 석상이 사방을 향해 버티고 있다. 이 사자 석상은 기원전 3세기의 조각인데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인도의 국장으로 쓰이고 있어 지폐나 동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부처님께서 최초 설법을 하시는 모습을 새긴 초전법륜상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설법인을 맺은 결가부좌의 초전법륜상은 굽타시대 불상 조각 가운데에서 최고 걸작의 하나인 동시에 인도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ORCHHA
오차는 괄라이르에서 잔시를 지나 카쥬라호가는 길로 18KM들어간 지점에 있다. BIR SINGH DEO가 자신에게 수여된 지역들을 관장하는 중심지로 삼았던 곳이다. 아름다운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찾는 사람이 적은 한적한 시골에 불과한 오차는 여행자를 묘한 감상에 젖게 만드는 곳으로 놓치기에는 아까운 곳이다.
* JEHANGIR MAHAL : 1606년에 제항기르의 방문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다. 이 아름답고 화려한 제항기르 마할 부근에는 땅 밑으로 설치한 배수관에 의해 관리되던 정원을 끼고 있는 RAJ PRAVEEN MAHAL, 주 관광청에 이해 숙소 개방된 SHEESH MAHAL, RAJ MAHAL등 각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건물들이 모여 있다.
* SUNDAR MAHAL/ LAKSHMI NARAYAN TEMPLE : 강을 따라 내려가면은 이 사원들이 나타난다. 각기의 사연을 지닌 채 존재하고 있는 이 사원들은 순례자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DINMAN HARDAULS PLACE : 형제의 부인을 탐했다는 의심에 대한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살한 왕자의 사연을 지닌 사원이다. 자살을 통하여 자신의 순결을 증명한 왕자는 이 지역의 신으로 승격되어 오늘날에도 섬겨지고 있다.
KHAJURAHO
카쥬라호에 이 소문난 사원들을 조성해 놓은 CHANDELLA 왕조는 라지푸트의 계통으로, 이처럼 외진 곳에 많은 수의 사원들을 조성해놓은 것을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 많은 신화를 가지고있다.
이들의 신화에 의하면 달의 신 CHANDRA가 과부 HEMAVATI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슴을 졸이다, 마침내 어느 여름밤을 틈타 지상에 내려와 그녀와 회포를 나누고 아침 이슬녘에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 찬드라는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지난 밤의 결과로 나오는 아이는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천하를 지배하는 왕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들은 수많은 사원들을 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이 아이가 찬델라 왕조의 창시자인 CHANDRATREYA(달의 아들) 이다. 무사 출신의 왕조답게 찬델라 왕조는 한때 비디샤와 괄리아르를 남북으로 경계로 삼고, 바라나시와 웃자인을 동서의 경계로 삼을 만큼 인도 내륙의 중반부에 걸쳐서 폭넓은 영역을 확보하였는데, 이처럼 500여 년을 이어가던 찬델라 왕조는 회교세력에 의해서 끝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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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왕조는 신화의 내용을 현실화시키려는 듯 그들이 한때의 수도지로 삼았던 이곳 카쥬라호에 950년 당대의 왕 YASOVARMANA로부터 1050년까지의 불과 100년 사이에 무려 85개의 사원을 조성해 놓은 것이다. 지금은 비록 22개밖에 남지 않았지만은, 무었 때문에 그들이 이처럼 동떨어진 위치의 장소를 수도지로 삼아 황금시절의 장소라는 뜻의 KHAJURVAHIKA 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많은 사원을 짓게 했는지는 아직껏 시원하게 밝혀진 바 없다.
뿐만 아니라 20KM 가량 떨어진 KEN 강에서 캐낸 사암들을 운반하고 깍고 세우는 그 엄청난 작업에 소요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조달하고 관리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카주라호가 이처럼 외진 곳에 자리잡으므로 서 이곳의 사원들은 11세기부터 인도의 중부와 북부를 휩쓸며 우상 파괴의 명분 하에 아름다운 사원들을 사정없이 파괴해버렸던 회교도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카쥬라호의 사원들은 그들 찬델라 왕조가 주로 섬겼던 SHIVA와 VISHNU신을 모신 것들인데. 이 사원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사원의 신전들을 둘러싸고 빽빽하게 새겨져 있는 조각들이다. 신전의 벽에다가 온갖 신과 여신을 비롯하여 요정이나 동물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묘사했을 뿐 아니라 병사와 연주인 그리고 당대 사람들의 일상 순간들처럼 실제 하는 것들을 묘사하여 사원을 장식한 조각들을 뜯어볼수록 생생한 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곳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남녀의 교합상인 MITHUNA 상(像)들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세로 남녀의 상이 얽혀 있는 이 미투나 상들은 과연 무슨 의도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새겨져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동기나 이유를 확실하게 밝힌 사람은 아직도 없는 것 같다.
* 볼거리들 : 카쥬라호의 사원들은 현재의 시가지를 중심으로 하여 동부와 남부 그리고 서부 지역에 나뉘어 있다. 시가지에 가까이 있는 사원군들은 서부지역 사원군으로 카쥬라호를 대표하는 힌두 사원들이 대부분 여기에 있다. 시가지에서 2KM 남짓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JAIN 사원군들은 동부 지역 사원군으로 분류되고, 이곳에서 남부로 더 나간 곳에도 몇 개의 사원이 흩어져 있어 남부 지역 사원군으로 분류되고 있다.
WESTERN GROUP TEMPLES : 입구에 들어서면 왼편으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락시미와 바라하 사원으로 900 년경에 건축된 것이다.
작은 규모의 신전인데 VISHNU 신의 3번째 화신인 멧돼지를 모신 곳이다.
* LAKSHMANA TEMPLES : 이 사원은 930-950년경에 건축된 규모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요정들의 조각들이 조각들과 함께 사원에 받친 기단 주변에 새겨진 작은 크기의 성적인 조각들로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곳이다.
* METANGESVARA TEMPLES : 크기가 2.5M에 이르는 시바 신 상징인 LINGA가 모셔져 있다.
* KANDARIYA MAHADEV TEMPLES : 이 사원은 건축미로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사원이다.
1025-1050년에 건축된 사원이다. 이 사원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900여개가 넘는 조각들은 사람들의 온갖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데, 카쥬라호의 유명한 미투나 상들 중의 유명한 것들이 여기에 있다.
* DEVI JAGADAMBA TEMPLES : 칸다리아 사원보다 조금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비 자감바다 사원은 원래 VISHNU를 모셨던 곳이지만 나중에는 시바의 부인인 PARVATI를 모시는 곳으로 바뀐 곳인데, 이곳에도 강렬한 인상의 미투나 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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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ITRAGUPTA TEMPLES : 이 사원은 북쪽으로 홀로 떨어져 있는 사원인데. 태양신인 수르야를 모셨던 사원으로 신전 안에는 7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모는 신상과 함께 11개의 화신의 얼굴을 지닌 비슈누상을 볼 수 있고, 신전의 외벽에는 사냥하는 모습과 춤추는 요정상 등을 볼 수 있다.
* 동부와 남부 지역의 사원들
* BRAHMA TEMPLE : 카주라호 마을 옆에 위치하고 있다.
비슈누 사원임에도 BRAHMA 사원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 것이고 근처에는 922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 2.5M짜리 원숭이 신이 모셔진 HANUMAN 사원이 있다.
*VAMANA TEMPLE:하누만 사원에서 길 따라 계속 북쪽으로 내려가면 벌판에 홀로 서 있는것 이다.
11세기 말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선녀들의 흥미로운 동작들이 볼 만하다.
* JAVARI TEMPLE : 바마나 사원에서 마을 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 사원이 나온다. 1075-1100년경의 사원으로 여인들이 조각이 볼 만한 사원이다.
* PARSVANATH TEMPLE : 이 사원은 세 자인교 사원 중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눈 화장을 하는 여인이나 발에서 가시를 빼는 여인등 널리 알려진 상들과 함께 몽골리언 얼굴의 여인상들이 있어 더욱 흥미로운 곳이다.
* PANA NATIONAL PARK : 카쥬라호에서 4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판나 국립공원은 546KM으 면적을 지니고 있다.
SATNA와 카쥬라호가 연결되는 길목에 이 공원의 일부를 통과하게 된다. KEN 강을 끼고 펼쳐져 있는 공원의 구역 내에는 여러 개의 폭포가 있어 사트나와 카쥬라호를 잇는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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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인도와 중국 사이에 끼여 있는 세계 유일의 힌두왕국 이다. 힌두왕국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8848M) 포함하여 세계 10대 고봉 중 8개가 있다. 이러한 위압적인 산의 장벽은 네팔을 외부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정치적 독립은 물론 그들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아주 특별한 지리적 조건이다.
네팔은 19세기 중반에서야 외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50년 초반만 하여도 네팔은 히말라야의 전설에 쌓인 신비로운 땅으로 여기어졌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자연의왕국’ 이라는 의미이여, 네팔 사람들 자신은 물론 외부 사람들도 히말라야와 네팔을 동일 시 하였다. 네팔은 히말라야로 유명하며 트레킹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 각광을 받고 있응 곳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역사상 독립적인 작은 왕국들이 존재해 오다 18세기에 이르러 통일 왕국을 이루어낸 네팔은 그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카투만두를 중심으로 한 주변지역은 거대한 박물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수십개의 종족이 빛어낸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는 거의 모두가 산을 중심으로 발전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므로 산을 이해하면은 네팔을 이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은 힌두 왕국 사람들은 인간 본연의 모습에 근접한 자연스러운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 냉엄하고 극한 자연환경에 순응하면서 살아왔지만 네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온순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네팔은 산악 국가이지만 지형은 산악지대부터 평야지대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북부 히말라야는 전문 등반이나 트레킹을 즐길 수 있고 중간 지역에서는 레프팅을 할 수 있으며 남부는 CHITWAN(치트완) 국립공원 같은 곳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정글 탐험을 즐길 수 있다.
* 네팔의 역사적 배경
네팔의 초기 거주자들은 NEWAR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종족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것이 없지만은, 그들의 언어가 티벳-버마군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동쪽에서부터 이주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도-유럽피안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서쪽에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융화하여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네와리의 전성기는 네팔이 통일을 이루기 전 카투만두 분지안에 작은 도시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을 때인 17세기이다.
지금까지 네팔의 중요한 문화유산은 ( 카투만두, 파탄, 박타플)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도시 국가들을 18세기에 이르러 GHORKHA족이 통일을 이루었다.
이후 인도-유럽피안에 속하는 고르카말이 네팔의 공식 언어인 NEPALI로 되면서 카투만두의 원주민이 쓰던 티벳- 버어마에 속하는 네와르말은 소수 민족 언어로 남게 되었다.
* 화폐 : N. RUPEE ( 1USD /62RUPEE)
* 통신시설 : STD, SDN, FAX, INTERNET ( 모든 통신시설이 가능하다)
* 기후 : 1년 내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 평균기온15-20, 몬순기간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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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투만두
카투만두는 도시 전체를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왕궁지역과, 타멜지역, 바그마티강 남쪽에 있는 파탄 지역이다. 파탄은 다른 도시이었는데 카투만두가 팽창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한 도시가 되었다. 왕궁지역은 왕궁 앞으로 곧게 난 길을 따라서 각 나라의 대사관, 항공사
고급호텔들이 들어서 있다. 이 지역은 별로 복잡하지도 않고 건물들도 깨끗하다.
왕궁 북쪽에 타멜지역이 있고, 이곳이 원래 카투만두이다. 지금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으나 거미줄처럼 나 있는 골목에는 오래된 나무 집들이 더 많다.
거미줄 같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작은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이 네팔을 소개하는 각종 홍보물에 단골로 나오는 두르바광장이다. 이곳에는 살아있는 여신의 집으로 유명한 KUMARI HOUSE) 가 있다. 그리고 여러 신전들과 각종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파탄지역은 바그마티 강을 끼고 있다. 이곳에도 역시 두루바 광장이 있고 7개의 오래된 신전들과 다른 건축 기념물들이 있다. 타멜 두르바 광장보다 더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그러나 편의 시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부족한 편이다.( 두루바는 궁전을 뜻한다)
* DURBAR SQURE (두루바 광장)
네팔의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다. 타멜의 호텔골목에서 복잡한 골목을 통해서 내려가다 보면은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목조건물들과 옛 궁전들,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 하우수가 있는 곳이다.
* HANUMAN DHOKA ( 하누만 도카)
옛 궁전인 이 건물은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이 궁전은 원숭이 신이 지키고 있는데,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다. 왕족들이 쓰던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 KUMARI HOUSE ( 쿠마리 하우스)
19세기에 MALLA왕족의 마지막 왕인 JAYA PRAKASH MALLA가 지은 것이다. 쿠마리에 대한 네팔 사람들의 신앙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해마다 거대한 쿠마리 축제가 있었다.
힌두인이 아니면은 정원까지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처녀신으로 알려진 쿠마리는 네와리 샤크야 계급으로 몸에 상처 자국이나 병이 없어야 한다. 첫 번째 월경을 하면은 다른 쿠마리로 대체된다.
* PASHPATHNATH TEMPLE ( 파슈파티나트 사원)
공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이 신전은 네팔에서는 유명한 사원이다.
이 사원의 앞으로는 네팔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바그마티강이 흐르고 있고, 이 사원에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화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네팔 사람들은 힌두교를 믿기 때문에 죽었을 때 신에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빛과 불에 의해서라고 믿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이 사원에서 화장하는 것은 가장 큰 소망으로 여긴다. 장례식이 있는 시간에는 외국사람들도 많이 모인다. 사원 바깥에서 구경 할 수 있다. 사원 안으로는 입장이 금지된다. 네팔에서 살아 있는 사원으로서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잘 관찰 할 수 있는 곳이다.
* SWAYAMBHUNATH ( 스왐부나트 사원)
타멜에서 서쪽으로 3KM떨어져 있다. 이 신전은 원숭이들이 많아서 일명 원숭이 사원으로도 유명하다. 사원 둘레에는 사람보다도 원숭이들이 더 많을 정도인데, 물건을 집어가기도 하고, 먹을 것을 들고 있으면 집단으로 덮치므로 조심해야한다.
전체적으로는 불교와 관련된 성지이지만 힌두신상들도 여러개 있어 힌두교인과 불교도들이 언제나 붐비는 곳이다.
* PATAN (파탄 지구)
본래는 카투만두와 다른 도시였으나, 도시가 커지고 다리가 건설되므로 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타멜지구에서 약 4KM 떨어져 있다.
파탄지구 안에도 두루바 광장이 있고 주위에는 힌두신전과 불교기념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파탄 두루바 광장은 ‘예술의 도시’라는 별명에 맞게 광장 그 자체가 예술품이다.
광장은 별로 크지는 않지만 타멜의 두루바 광장보다 훨씬 더 차분한 느낌이다.
* KRISHNA TEMPLE ( 크리슈나 사원)
이 신전은 12세기에 어느 돈 많은 상인의 기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원이다. 보통의 힌도 신전과는 다른 탑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 GOLDEN TEMPLE ( 황금 사원)
불교의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원 안의 법당에는 금박의 부처님이 계신다.
원래의 이름은 HIRANYA VARNA MAHAVIHARA이다.
* BHAKTAPUR (박다풀)
카투만두 시내에서 약 14KM 떨어진 이 도시는 생긴 모양이 조개 껍데기 같다고 하여 박다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계의 구도시 중 옛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 변하지 않은 곳이 박다풀이다. 이곳의 두루바 광장은 다른 두곳에 비해 크고 깨끗하다. 이곳은 다른 현대식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전히 중세풍의 도시이다. 주위에는 온통 신전과 오래된 나무건축물, 그리고 탑들이다.
* GOLDEN GATE ( 황금의 문)
이 광장의 모든 건축물들은 모두가 55개의 창문을 가지고 있는 박다풀 왕궁을 둘러서 있듯이 있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황금의 문으로 유명하다. 이 앞에는 기도하는 모양의
말라 왕이(MALLA KING)이 왕궁을 쳐다보고 있다. 이 왕궁은 17세기에 말라 왕조 시대에
BHUPATINDRA왕이 지은 것이다.
* BATSALA DEVI ( 울부 짖는 개의 종)
왕궁 앞의 돌로 된 신전 옆에 위치하고 있는 이종은 1737년 RANJIT왕이 만든 것이다.
이 왕이 다스리던 기간에 시간을 알려주는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3층의 탑으로 된 BHAIRA VANATH신전, 한 나무의 줄기로만 만들었다는 PATTATRAYA
신전, 공작 모양의 창틀로 유명한 PUJARI MATH등이 있다.
* POKHRA (포카라)
카투만두에서 서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포카라는 PHEWA LAKE(페와호수)와 주변에 눈 덮힌
산봉우리들로 유명하다. 호수의 주변에서는 날씨만 좋으면은 눈 덮힌 산을 언제든지 볼 수가 있다. 여행자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신들의 산 ( MACHHAPUCHARE)는 페와호수에서
겨우 28KM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아무런 산맥들도 없다.
신들의 산을 중심으로 안나푸르나의 여러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 모습은 포카라를 찾는 여행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 PHEWA LAKE (폐와 호수)
포카라의 북쪽에는 안나푸르나의 다섯 봉우리와 마차푸르가 버티고 있는데, 산에 쌓여 있는 물이 녹으면서 생긴 많은 골짜기들이 있다. 특히 이 호수는 물의 색깔이 아름답고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하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마차푸레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이곳은 언제나 여행자들로 붐빈다.
* DAVID FALL ( 데이비드 폭포)
1982년 영국인 신혼부부인 데이비드가 이 폭포에서 실종이 되면서 이 이름이 붙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폭포가 아니라, 평지에서 시작하여 지하로 떨어지는 폭포이다.
폭포 주위에는 그 위용을 실감나게 하듯이 많은 물안개와 진동으로 여행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다.
### 인도 여행 준비물 ###
1) 찬-고추장, 김, 마른반찬(오징어포 등) * 필요하신 분
2) 간식-알사탕, 초코렡, 비스켙등. * 필요하신 분
3) 덧버선 1켤레 ,긴 바지.( 사원 방문 시 필요)
4) 델리 지역의 지금 날씨/ 우리나라의 여름날씨
4월 달부터 6월 말 까지 평균 날씨 38도 .
5) 손수건. 치약. 칫솔, 헤어드라이기
6) 신발(랜드로바, 샌들 )가급적 편하고 신던 것
7) 카메라, 필름, 필기도구.
8) 약-소화제, 지사제, 감기약 이외 평소에 드시는 약
9) 소지품(휴대용)가방-간편한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것.
10) 주무시고 나오실 때는 침대 머리맡에 1$정도 놓아 주셔야합니다.
PLEASE NOTE: 준비물은 살펴보시고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준비합니다, 인도의 음식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음식에 들어가는 여러 가지 양념들은 다 천연의 나뭇잎, 뿌리 , 열매 등에서 축출한
것입니다. 양념들은 피를 깨끗이 하고 더위를 조절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다소
맟지 않으시더라도 보약을 드신다는 마음으로 인도음식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PLEASE NOTE:인도는 국내선 /기차가 자주 취소 되거나 , 연착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행기/기차 취소 시 가이드의 안내로 육로로 이동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 차액 환불은 없습니다.
이때 느긋하게 기다리셔야 합니다 .
PLEASE NOTE:
1) 물은 반드시 생수를 드셔야 하며, 생수는 항상 병의 마개를 살펴보고 마셔야 합니다.
2) 여권이나 개인의 소지품은 잘 간수하여야 하며, 방을 비울 때 항상 휴대하여야 합니다.
3)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우리의 가치관으로 그들을 과소 평가하여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4) 투어 기간동안 가이드의 말을 충실히 따르시고 가급적이면 개인행동을 자제하셔서 단체가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PLEASE NOTE : 복장
1)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입니다.
2) 긴바지, 반셔츠(가벼운 것) 가디건 (카투만두 일출감상시 대비)
3) 덧버선 (인도의 사원에서는 맨발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착용하시면 편리합니다).
4) 상의/ 반팔옷(6개 가벼운 옷) 하의 ( 긴바지 5개) / 편한옷 ( 잠옷대용 한 벌)
5) 필수 준비물 (선글라스, 모자 , 바르는 모기약)
PLEASE NOTE:
1) 인도 RUPEE는 외국에서 가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위법입니다. (반드시 인도에서 환전)
2) MINERAL WATER / 불포함, PER DAY 1병 물 제공
3) 카메라피 불포함 ( 각 유적지 카메라피 )
4) 전화는 호텔에서 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 아주 비쌉니다
(가이드에게 말씀하시면 공중전화방 알려 드립니다)
5) 인도에서 사신 물건은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
6) 여행을 즐겁게 하기 위한 개인 기호식품
햇반 1인 3개 , 컵라면 3개 , 튜부 고추장 , 깻잎 통조림 (2통) , 마른김 등을 준비 하시면
식사 시간이 즐겁습니다 .
호텔정보
- 델리 (del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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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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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진
HYATT REGENCY
5 성급
http://delhi.regency.hyatt.com
THE ASHOK
5 성급
INTERCONTINENTAL
5 성급
http://www.ichotelsgroup.com/intercontinental
CITY PARK
4 성급
http://cityparkhotels.com
QUTUB HOTEL
4 성급
http://www.clarionnewdelhi.com
AVOLON COURTYARD
4 성급
SILVER FERNS
4 성급
- 자이푸르
호 텔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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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RYINN
& SUITES
5 성급
LE MERIDIEN
5 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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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 ROYAL DAYS
4 성급
www.kkroyaldays/kkrd
THE GOLD PALACE
3 성급
www.hotelgoldpalace.com
THE WALL STREET
3 성급
- 아그라
호 텔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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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GHAL AGRA
5 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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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PEE PALACE
5 성급
HOWARD PARK PLAZA
4 성급
HOTEL AMAR
3 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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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SSON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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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adisson.com/hotels/indkhaj/ro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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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KS KHAJURAHO
3 성급
http://www.hotelclarks.com/clarks-khajuraho/facilitie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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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ISSON
5 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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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KS VARANASI
5 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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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ADA HOTEL
5 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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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reztrip.com/RezTripWeb/defaultSearchDisplay.do?propertyId=10169209
HOTEL MERADEN GRAND
4 성급
※ 주황색 표시는 장보고투어 주거래 호텔입니다.
성지순례 상품
1) 성지순례
-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았던 곳 : 인도
한국의 종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의 시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깨닫고, 설법하고 열반에 든 땅 인도. 부처님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는 성지들은 세계 각 국에 온 순례자들로 붐빈다.
- 인도, 네팔의 8대 불교 성지순례
․ 룸비니(제1성지: 부처님 탄생지) - 부다의 탄생과 관련한 모든 유적지들이 모여 있는 곳, 마야데비 사원, 아쇼카 석주, 보리수나무 등이 있다.
․ 보드가야(제2성지: 부처님 성불하신 땅) -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도시. 그는 고행이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님을 깨닫고 인근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각(無上正覺)의 경지를 터득, 부처님이 해탈에 이른 자리엔 마하보디 사원이 세워져 있다.
․ 사르나트(제3성지: 초전법륜) - 불교 4대 성지 중의 하나로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설법을 편 곳. 인도를 당대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만들며 불교를 이웃 나라들로 전파시킨 아쇼카 대왕 시대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찰과 탑이 세워졌다.
․ 쿠시나가르(제4성지: 열반지) - 아난다를 비롯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처님이 두 그루의 사라수 사이에 누워 열반에 이른 곳. 부처님이 입멸한 자리에 세워진 열반당이 있고, 그 뒤엔 열반탑이 있다.
․ 스라바스티(제5성지: 기원정사)
․ 바이샬리(제6성지)
․ 라지기르(제7성지) - 부처님 당시 왕성했던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왕사성 라즈기르는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이다. 분지의 동남쪽 비탈에는 법화경을 설한 장소로 유명한 영취산이 자리 잡고 있다.
․ 나란다(제8성지) - 세계 최대였던 불교대학
2) 호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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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AND MUMBAI
(INTERCONTINENTAL)
5성급
http://www.ichotelsgroup.com/intercontinental/en/gb/locations/rooms/suites/mumbai-grand
GRANDHYATT MUMBAI
5성급
JW MARRIOTT MUMBAI
5성급
http://www.marriott.com/hotels/travel/bomjw-jw-marriott-hotel-mumbai/
COMFORT INN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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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omfortinnheritage.com/rooms.html
WEST ENDMUMBAI
4성급
http://www.westendhotelmumbai.com
HOTEL SHAHIL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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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ANTA AMBASSADOR
5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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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elcomhotelrama.com/accomodation.html
THE MEADOWS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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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텔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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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JATA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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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US NIKKO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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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YAL RESIDENCY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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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DHARTHA INTERNATIONAL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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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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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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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TUS NIKKO
3 성급
THE ROYAL RESIDENCY
3 성급
호 텔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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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DENS RESORT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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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LBARI RESORT
5성급
THE POKHRA GRAND
4성급
SHANGRI-LA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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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텔 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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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ENCYKATHMANDU
5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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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EL YAK & YETI
5성급
ROYAL SINGI HOTEL
4성급
SHANGRI-LA HOTEL
4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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